‹ 목록으로 성녀의 유효기간

2화

왕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신전 담장 안에서만 살아온 여덟 살짜리 눈에는 노점상의 천막이며 아이들이 굴리는 나무 바퀴며 하는 모든 것이 신기했는데, 심지어 지나가는 개 한 마리조차 신전에서 기르는 하얀 비둘기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옆에 앉은 신관이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창을 조금 더 열어주는 대신 "성녀님은 예를 지켜 앉아 계셔야 합니다" 하고 짧게 못을 박았다. '예의는 눈 감고도 지킬 수 있는데, 구경까지 막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겉으로는 순순히 등을 곧게 펴고 앉았고, 무릎 위에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로 얼마쯤 더 가다 보니 어느새 왕궁의 정원에 도착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신관들 여럿이 나를 에워싸듯 붙어서 걸음마다 옷깃을 정돈해주고 머리 장식을 매만졌는데, 그 손길이 하나같이 조심스럽고 정중해서 오히려 숨이 막혔다. '나 아직 걸을 수 있는데.' 정원은 넓고 화려했고, 곳곳에 놓인 조각상이며 분수며 하는 것들이 신전의 소박한 뒤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웅장했지만, 그런 풍경을 마음껏 둘러볼 여유도 없이 곧바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는 지루했다. 귀족들이 나란히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나는 그들 하나하나에게 손끝의 빛을 살짝 흘려주는 축복을 반복해야 했는데, 처음 몇 사람까지는 그나마 신기해서 견딜 만했지만 열 번째쯤부터는 팔이 저려오는 것보다 지루함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어떤 귀족은 내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는데, 그 과장된 몸짓이 어쩐지 낯설어서 나는 그저 웃어 보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들 왜 이렇게까지 감동하는 거지. 나는 그냥 손끝에서 빛을 좀 흘려주는 것뿐인데.' 그렇게 정해진 순서가 얼추 끝나갈 무렵, 나는 잠깐의 휴식 시간을 틈타 정원 한쪽으로 슬쩍 빠져나왔는데, 그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라 그저 어른들 시선에서 벗어나 나무 그늘에 잠깐 앉아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 분만, 딱 오 분만 아무도 모르게 쉬자.' 신관들이 다른 귀족을 상대하는 사이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잔디를 밟으며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나무 그늘 아래에는 이미 다른 아이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고,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유난히 짙은 자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이 나를 향해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 색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낯설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보석 가게에서 방금 훔쳐온 눈알 같은데.' 옷차림도 제법 좋은 천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어디에도 화려한 장식은 없었고, 그저 소년 하나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뿐이었다. 그 아이는 무릎에 종이를 펼쳐놓고 나뭇가지로 뭔가를 그리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그림을 슬쩍 가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보지 마." 짧고 무뚝뚝한 그 말투에 나는 오히려 궁금증이 더 커져서 발끝을 들고 종이를 넘겨다봤는데, 거기에는 정원의 새와 나무가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져 있었다. "잘 그리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쳐다봤고, 그 시선에는 경계와 놀라움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너 누구야." "그건 내가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 먼저 온 건 나였는데."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슬쩍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는데, 아이는 그런 나를 잠깐 노려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생각보다 순순하네.' 우리는 이름도 모른 채 한동안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아이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 옆에서 그 손끝의 움직임을 구경하는 게 어느새 즐거워졌다. 나뭇가지가 종이 위를 사각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선이 하나둘 늘어나고, 그 선들이 모여 새의 부리며 나무의 결이 되어가는 걸 보고 있으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신전에서는 누구도 나를 이런 눈으로 보지 않았다. 존경하거나 조심스러워하거나, 아니면 아예 시선을 피했지, 지금 이 아이처럼 그저 옆에 있는 사람으로 대해준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 애는 내가 성녀인 걸 모르는구나.'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는데, 나는 굳이 밝히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저 이름만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짧게 답했다. "하준." "나는 서율이야." 그렇게 서율과 하준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지나갔다. 하준은 내 이름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냥 서율로 봐줘. 서율이면 충분해.' 그때 갑자기 정원 저편에서 신관들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는데, 하준은 내가 떠나려 하자 그림 한 장을 뜯어 내밀었다. "가져가." 그건 방금 전 나를 스케치한 그림이었고, 짧은 시간에 그렸는데도 내 표정이며 자세가 제법 닮아 있어서 나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 이걸 그렸대.' 나는 그림을 받아들면서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마워"라는 말만 겨우 내뱉었는데, 하준은 그 말에 대꾸도 없이 다시 새 종이를 펼쳤다. 마치 나와의 대화가 이미 끝났다는 듯한 태도였는데, 그게 서운하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나서 나는 그림을 품에 안고 신관들에게 이끌려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손끝에서 이상한 감각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 감각은 마치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아주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방향을 바꾸는 느낌이었다. 평소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그날따라 유난히 따뜻하게, 아니 오히려 조금 뜨겁게 느껴졌는데, 대신관이 다시 나를 데려가려고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게 이상했다. '이 아저씨 손이 갑자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대신관은 내 표정을 살피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자리에서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나중에 신관들이 그 아이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왕태자, 강하준이라는 걸 알려주었을 때 나는 놀라움보다 먼저 '아, 그래서였구나' 하는 이해가 앞섰다. 소년치고는 지나치게 무심하고 당당했던 태도가, 그리고 신관들이 정원 저편에서부터 나를 찾아 헤매던 그 소란스러움이, 이제 와서야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대신관은 곧 흥분한 목소리로 나와 하준 사이에 운명의 수호자 계약이 자연스럽게 맺어졌다고 선언했는데, 그건 설아 여신이 정한 방식대로 성녀와 수호자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라 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신관들도 그 말을 듣고는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그저 그림을 더 꽉 껴안았다. '몰라서 다행이지, 알았으면 그림 구경 같은 것도 못 했을 텐데.' 만약 처음부터 저 아이가 왕태자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아마 예의를 차리느라 제대로 말도 못 붙였을 거고, 그 그림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눈 그 짧은 대화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하준이 그려준 그림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침대 옆 협탁에 촛불 하나를 켜두고 그림을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보았다. 짙은 자주색 눈동자를 가진 그 소년의 무뚝뚝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잠들기 직전 손끝에서 다시 그 낯선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뜨거움이 아니라 미묘하게 흔들리는 진동 같은 것이었는데, 마치 촛불이 바람에 잠깐 일렁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양새였다. 나는 그 흔들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오늘 만난 아이의 눈동자 색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때는 그 작은 흔들림이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자라날 이상 징후의 첫 페이지라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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