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촛불 그림자 사이로, 한 남자의 형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문틀에 몸을 기댄 자세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얼굴 한쪽으로 흘러내린 상처가 촛불에 비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칼자국이었다. 오래된 것이지만, 아물면서도 뒤틀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 사람이, 선우진.'
이름만 들었을 때는 그저 소문 속의 인물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그 소문들이 얼마나 얕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마치 유리 조각처럼, 빛은 반사되지만 온기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렸다는 것을, 그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정리를 하다가……"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그 상자는 손대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방 전체를 눌렀다.
단어 하나하나가 마치 못을 박듯 정확하게 떨어졌다.
'대체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었길래.'
궁금증이 일었지만, 지금 그것을 물을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그 일을 캐묻지 않았다.
그저 상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방을 나섰다.
그 짧은 시선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날의 첫 만남은 그렇게 짧고 서늘하게 끝났다.
하지만 그 상자 속의 흉터 자국은, 이후로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마다 눈을 감으면, 그 상자의 나뭇결과 낡은 자물쇠가 떠올랐다.
'저것이 그의 과거와 관련된 무언가일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은 며칠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며칠 후, 나는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선우진 후작의 정실로서, 왕실에 처음으로 인사를 올리는 자리였다.
시녀들이 아침부터 나를 붙잡고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손질했다.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예복이 어깨를 짓눌렀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낯설었다.
서녀로 자라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이 옷이 나를 지켜줄 리는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방패는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마차에 올랐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서혜와 강지아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은 이미 여러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도 초대받은 것이었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강서혜의 눈빛에는 이미 계산이 서려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이 자리가 결코 평온하게 지나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다가와 짐짓 다정한 척 웃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목소리는 한껏 낮췄지만 주변에 다 들릴 만큼 또렷했다.
"어머, 서인이 아니냐. 이렇게 좋은 자리에 오다니."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날은 숨길 수 없었다.
주변의 귀족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이미 부채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 아이가 서녀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강서혜의 목소리가 은근히 커졌다.
일부러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조절한 크기였다.
지아가 그 옆에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귀에 박혔다.
"언니는 하녀 옷도 잘 입었었는데, 이렇게 귀부인 옷을 입으니 낯설어요."
지아의 말투에는 순진한 척하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주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나는 그 웃음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수십 개의 시선이 마치 화살처럼 나를 향해 쏟아졌다.
'여기서 흔들리면, 끝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표정만은 흔들리지 않도록 애썼다.
과거의 나였다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강서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변화였다.
"제가 서녀인 것은 사실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또렷하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담담한 인정에, 좌중이 잠시 조용해졌다.
강서혜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다시 미소로 덮였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후작님의 정실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내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강서혜 부인께서 그토록 신경 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부러 예의를 갖춘 말투로,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당신이 나를 걱정할 자격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 말에 강서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채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지아 역시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말을 잃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이렇게 맞받아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주변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비웃음에서, 흥미로운 관심으로.
몇몇 귀족들은 이제 강서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과 순응만이 나의 무기였는데, 이제는 다른 무기도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말 한마디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서녀로 살아온 열여덟 해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강서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남긴 채 자리를 옮겼다.
지아도 그 뒤를 따라가며 나를 한 번 흘겨보았을 뿐이었다.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최소한 오늘 이 자리에서는, 내가 완전히 밀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나는 우연히 기둥 뒤쪽을 지나치다 멈춰 섰다.
그곳에, 선우진이 서 있었다.
그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둠에 녹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조용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강서혜와의 대화 내내 지켜보았던 걸까, 아니면 방금 도착한 걸까.
그 답을 알 수 없어서 더욱 불안했다.
촛불 아래, 그의 눈빛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차가움과는 결이 달랐다.
무어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였다.
'저 사람이, 그 모든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낯선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른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촛불의 흔들림만이, 그 침묵의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