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나는 창고방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낡은 나무판자 틈으로 별빛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이 집 전체가 나를 향해 비웃는 것 같았다.
'죽음의 후작.'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혀끝에 남는 씁쓸함이 있었다.
그 이름이 주는 공포는 분명했다.
소문 속의 그는 아내를 학대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짐승이라 불렀다.
밤마다 저택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겪어왔다.
이 저택에서의 아홉 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매 맞아 부러진 손가락의 통증도, 굶어 죽을 듯 배가 텅 빈 밤의 허기도, 나는 견뎌왔다.
강서혜의 손찌검보다 더 지독한 것이 있을까.
그 물음에 나는 쉽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무엇이 더 두려운가.'
지금의 이 삶을 계속 사는 것과, 미지의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 답은 놀랍도록 간단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나는 '아가씨'로 불릴 자격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그 한 마디, '아가씨'라는 호칭이 얼마나 낯선지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홉 해 동안 나는 그저 '그 애'였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이건 생존이 아니라 탈출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 두 단어를 구분해서 생각했다.
생존은 지금까지의 나였다.
발버둥 치며 오늘을 넘기는 것, 그것이 생존이었다.
탈출은, 앞으로의 내가 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내일을 계획하는 것, 그것이 탈출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두려움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창고방의 냉기가 등을 파고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뜨거워졌다.
그렇게 나는 뒤척임 없이 아침을 맞았다.
혼인식 준비는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왕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나는 낡은 마차에 실려 저택을 떠났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옷 몇 벌과 손바닥만 한 손수건 하나가 내 짐의 전부였다.
배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강서혜도, 지아도,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글프기보다는 차라리 후련했다.
마지막까지 나를 붙잡는 손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다만 창밖으로 언뜻 보인 강도현의 뒷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넓은 어깨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나는 마차 창틀에 이마를 대고 지켜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
실망조차 하지 않을 만큼, 나는 이미 그를 지운 지 오래였다.
마차는 반나절을 달려 도성 외곽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은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숲이 짙어지고, 길이 좁아졌다.
선우진 후작의 저택이었다.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저택의 규모에,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대문은 소문에 비해 지나치게 정갈했다.
검은 돌담 위로 담쟁이가 얌전히 뻗어 있었다.
담쟁이 잎사귀 하나하나가 가지런히 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 일일이 손으로 다듬은 듯했다.
'피와 죽음의 저택이라던 소문과는, 어딘가 다르다.'
핏자국이나 곡소리 같은 것은 흔적조차 없었다.
정원의 나무들도 규칙적으로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다.
문 앞에는 나이 든 집사와 몇몇 하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단정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집사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눈빛에는 경계심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들도 소문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두려워하는 걸까.'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경계를 산다는 것은, 적어도 무시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후작은 그 자리에 없었다.
"후작님께서는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집사의 설명은 간결했다.
더 이상의 부연은 없었다.
나는 그 부재가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적어도 아직은, 그 남자와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문 속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조금 더 미뤄도 좋다.'
하인들은 나를 저택 안으로 안내하며, 살림을 정리하는 소소한 임무를 맡겼다.
창고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방마다 먼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일이랄 것도 없었다.
아홉 해 동안 해온 노동에 비하면, 이 정도는 손끝 하나 까딱하는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 저택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하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이 배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며 마주친 하녀 하나는, 나를 보고 눈을 피했다.
그 눈빛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또 다른 하인은 서재 근처를 지날 때마다 유독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 방에 무엇이 있길래.'
'소문 속의 폭군이 다스리는 집이라면,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없다.'
폭군의 집이라면 하인들은 눈치를 보며 벌벌 떨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곳의 하인들은 오히려 조심스럽게, 애도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 괴리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 저택에는 소문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밤이 깊어질 무렵,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서재에 들어섰다.
낮 동안 미처 손대지 못한 구석이었다.
촛불을 밝히자 방 안 가득한 책과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은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곳곳에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방 안에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그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섞여 있는 것은, 마른 꽃잎의 향 같기도 했다.
책상 한쪽에 놓인 낡은 상자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다른 물건들과 달리, 그 상자만은 유난히 손길이 자주 닿은 흔적이 있었다.
뚜껑의 모서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은사슬에 매달린 작은 장식이었다.
세월이 지나 빛깔이 흐릿해졌지만, 원래는 꽤 정교하게 세공된 물건이었으리라.
장신구의 표면에는 무언가에 긁힌 듯한 흉터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억지로 긁어낸 자국이었다.
'이건, 전처의 것인가.'
소문 속의 그 여인, 죽음으로 몰렸다던 그 아내의 유품일지도 몰랐다.
그 흔적을 손끝으로 쓸어보는 순간,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뭘 하고 있지."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