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음의 후작과 혼인이라니

2화

그날로부터 아홉 해가 지났다. 아홉 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것인지, 나는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확인했다. 거울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녹이 슬어 뿌옇게 흐려진 놋쇠 조각이었지만. 그 안에 비친 얼굴은 더 이상 아홉 살의 그것이 아니었다. 채찍은 그날 이후로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등에 새겨진 흉터의 개수를 세어보려 했던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숫자를 셈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제는 소리를 내지 않는 법을 알았다. 채찍이 살갗을 가를 때, 숨을 참는 타이밍과 그 후에 천천히 내뱉는 리듬까지도 몸이 알아서 조절했다. 감정을 지우는 법도 배웠다. 그것은 배웠다는 표현보다는, 살기 위해 몸이 스스로 익힌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강서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딸'이 아닌 '있으나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처음에는 미워하는 시선이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미움조차 받으려면 존재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조차 되지 못했다. 하녀들과 같은 줄에 서서 명령을 받았다. 새벽마다 우물가에 줄을 서고, 각자 맡은 일감을 배정받는 그 대열 속에 나도 섞여 있었다. 다른 하녀들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도 익숙해졌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특별하게 보지 않았다. 지아의 옷을 다리고, 지아의 신발을 닦았다. 동생이라 부르기도 낯선 그 아이의 옷깃에 다림질 자국 하나라도 남으면, 그날 밤은 저녁을 굶어야 했다. 그 손으로 한때는 자수를 배우던 손이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손끝에는 바늘 자국 대신 뜨거운 인두에 데인 흉터가 새로 생겼다. 바늘로 꽃잎을 놓던 손이 이제는 남의 신발에 광을 내는 손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되새길 여유조차 없었다. "강서인, 물 떠와." 지아는 내 이름을 부를 때조차 하인을 대하듯 했다. 이름 뒤에 붙는 존칭 하나 없이, 마치 개를 부르듯 던지는 말투였다. 한때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라 부르던 아이였다는 사실이, 지금은 먼 옛날의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말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물동이를 들고 우물가로 향하는 발걸음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반응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저항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저택 안에서, 표정을 감추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 것으로 남은 무기였다. '감정을 드러내면, 저들이 이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 매일의 습관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그리고 밤에 눈을 감기 전, 나는 늘 같은 말을 되새겼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는, 나를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이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저택의 복도에서 아버지 강도현과 마주쳤다. 그는 왕실 업무로 오랜만에 집에 들른 참이었다. 복도를 울리는 그의 발소리는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가죽 부츠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저택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물동이를 들고 있었다. 양손 가득 채워진 물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여유는 없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머리를 최대한 낮추고, 시선은 바닥에 고정했다. "백작님."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그 두 글자를 내뱉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이지, 스쳐 지나갔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을 보듯,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는 궁금함도, 의심도, 심지어 짜증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완전한 무관심. "게 있는 하녀는 처음 보는군."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말투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서늘했다. 악의가 있었다면 최소한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을 텐데, 저 말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을 삼키는 법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을 참았다.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저 사람에게 나는 이미 딸이 아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함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물동이를 든 손이 떨렸다. 찬물이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그 차가움조차, 지금의 내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물이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흘러내려도, 나는 그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저택 대문 앞에 낯선 마차가 멈춰 섰다.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였다. 금박으로 장식된 문양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응접실을 정돈했다. 먼지를 털고, 촛대를 새로 놓고, 값비싼 카펫을 깔아두는 그 모든 준비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전령관께서 오셨습니다!" 문지기의 외침이 저택 전체에 퍼졌다. 그 외침에 강서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사해졌다. 방금까지 하녀를 나무라던 서릿발 같은 표정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녀는 지아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옷깃을 여러 번 만지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신경 쓰는 그 모습에서, 이 방문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부엌 뒤편에서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장작더미 사이에 몸을 숨기듯 서서, 물동이를 든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들은, 언제나 나를 비켜 지나갔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곧 알게 될 것이었다. 응접실 문틈으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틈 사이로 살짝 엿보인 그 남자의 뒷모습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절제된 몸짓이 인상적이었다. 낮고 단호한, 조현민이라는 왕실 전령관의 목소리였다. "왕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응접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말에 강서혜의 웃음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화사했던 얼굴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굳어갔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왕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내 이름이 불리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더니, 이내 종이를 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낯선 문장이 흘러나왔다. "강서인 아가씨를 찾으라는 왕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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