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강서인 아가씨를 뵙고자 합니다."
조현민의 그 말이 응접실을 얼어붙게 했다.
나는 부엌 문틈으로 그 소리를 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걸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걸레였다.
바닥에 닿는 순간 축축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내 이름을, 저 사람이 왜.'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강서혜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다.
"그 아이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 침착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본 건 오랜만이었다.
'뭔가 있구나.'
나는 문틈에 눈을 더 가까이 붙였다.
"왕명입니다, 부인."
조현민의 어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 치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정확한 발음이었다.
마치 이미 수백 번은 반복했을 문장처럼 매끄러웠다.
"거부는 곧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응접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부엌에서 그 침묵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 한 명이 부엌으로 들이닥쳤다.
"아가씨, 어서……!"
그녀의 손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거칠고 급한 손짓이었다.
나는 결국 하녀의 손에 끌려 응접실로 들어섰다.
낡은 옷차림 그대로였다.
소매 끝이 해진 무명옷, 발끝이 갈라진 신발.
그런 몰골로 응접실 한복판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조현민의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놀라움도, 실망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시선이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기록을 대조하는 듯한 눈빛.
'저 사람은 이미 내가 어떤 처지인지 알고 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무덤덤할 수는 없었다.
"강서인 아가씨."
그가 나를 정확히 그렇게 불렀다.
그 호칭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순간 발끝이 저릿했다.
아가씨라는 말.
이 집에서 그 단어가 나를 향해 쓰인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강서혜는 늘 나를 그저 '저 애'라고 불렀고, 지아는 '언니'라는 말조차 아까워했다.
그런데 지금, 왕궁에서 온 전령관이 나를 아가씨라 부르고 있었다.
그 낙차가 기묘했다.
"선우진 후작과의 혼인이 왕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응접실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누군가 숨을 멈춘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지아가 먼저 반응했다.
"죽음의 후작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 새된 목소리로 나를 무시하던 그 애가, 지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사람, 부인을 학대하고 죽였다는 그 사람이잖아요."
조현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미간 하나 움직이지 않는, 완벽하게 통제된 얼굴이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말투에서 나는 확신이 아니라, 반복된 형식적 답변의 냄새를 맡았다.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아온 사람의 말투였다.
'저 사람도 그 소문을 부정하지 못하는구나.'
부정할 수 있었다면 저렇게 짧게 끊지 않았을 것이다.
부정할 수 없기에, 형식적인 문장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선우진.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전쟁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섬멸했다는 남자.
전신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 영웅.
그리고 지금은, 아내를 잃고 악명만 남은 남자.
시장에서 떠도는 소문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누군가는 그가 전장에서 적의 목을 손수 베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가 아내를 손수 목 졀렀다고 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떨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되새기며 두려움과 함께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두려움은 당연했다.
살아서 돌아온 자가 드물다는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
하지만 그 두려움 밑에 깔린 다른 감정은, 낯설게도 기대와 비슷한 무언가였다.
'이건, 어쩌면.'
이 집을 벗어날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강서혜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전령관님, 착오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희 집에 그런 딸은……"
그녀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조금 더 다급했다.
마치 지금이라도 나를 없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백작님께서 이미 사전 승인하셨습니다."
조현민의 그 한마디가 강서혜의 말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백작님이…… 승인을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강도현 백작님께서는 왕궁에서 이미 서명을 마치셨습니다."
조현민이 서류를 펼쳐 보였다.
그 위에 아버지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붉은 인주가 아직도 선명한, 오래되지 않은 서명이었다.
나는 그 인장을 바라보며 이상한 허탈함을 느꼈다.
'아버지는, 나를 팔았다.'
분노보다 먼저 온 것은 허무함이었다.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던 아버지가, 마침내 나를 떠올린 순간이 바로 이 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이었다는 게.
그 사실이 우습기까지 했다.
강서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표정으로 바뀌었다.
경악에서, 미묘한 안도로.
입가에 걸린 미소는 아주 얕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나를 힐끗 보았다.
마치 오랜 골칫거리를 마침내 떨쳐낸다는 눈빛이었다.
'저 여자는 지금, 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치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죽음의 후작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곧 나를 처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여기는 눈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결심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면 나는, 순순히 사라져줄 생각이 없다.'
조현민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 안의 모든 눈이 나에게 쏠렸다.
강서혜의 냉소, 지아의 불안, 그리고 조현민의 무표정.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인은…… 언제입니까."
내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나왔다.
조현민의 눈매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었다.
"사흘 후입니다."
그의 대답이 응접실에 떨어졌다.
사흘.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는 이 집을 완전히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의 후작이라 불리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