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궁 생활이 시작되고 열흘쯤 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다른 정빈 후보들과 마주쳤다.
열흘 동안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미주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하루의 전부였다. 궁이라는 곳이 이렇게 심심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그 평화가 딱 열흘 만에 깨졌다.
"전하, 오늘은 중정에서 다과 모임이 있어요."
미주가 옷을 골라주며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꼭 가야 해?"
"정빈 후보들끼리 예의상 갖는 자리라서요. 안 가시면 오히려 더 말이 나올 거예요."
참석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쩌겠어. 궁 예법이라는 게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거지.
중정에 도착하니 이미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지수는 붉은 옷에 금실을 수놓은 화려한 차림이었다. 옷자락 하나까지 신경 써서 고른 게 눈에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설국의 왕녀시라고요. 그쪼그만 나라에서 예법 교육을 제대로 받으셨을지 걱정이네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라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행히 제 나라도 예법은 있답니다."
윤지수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옆에 앉은 한혜원이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가렸다.
한혜원은 연분홍 옷을 입고 있었는데, 겉보기엔 온화했지만 눈빛만은 지수보다 더 차가웠다. 웃는 얼굴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눈이었다. 저런 눈을 나는 몇 번 본 적이 있다. 대개 뒤에서 사람 뒤통수를 치는 사람들의 눈이었다.
다과가 이어지는 내내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나를 찔러댔다. 설국의 풍습이 궁의 예법과 다르다는 걸 은근히 지적하고, 내가 답할 때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저 웃으며 받아넘겼다. 이 정도쯤 예상했으니까. 왕녀라는 이름값 하나로 온 이방인을 곱게 봐줄 리가 없지.
다과가 끝나갈 무렵, 사건이 벌어졌다.
내 시종 미주가 국그릇을 나르다가, 한혜원의 옆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어머."
한혜원이 갑자기 팔을 움직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우연인 것처럼. 옷소매가 살짝 흔들리는 그 각도까지 계산된 것처럼 매끄러웠다.
국이 쏟아졌다. 미주의 손과 옷자락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주가 새파랗게 질려서 고개를 조아렸다. 뜨거운 국물에 손등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미주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걸 똑똑히 봤다.
한혜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종 교육을 어떻게 시키셨나요, 왕녀 전하. 이렇게 손이 굼뜬 아이를 곁에 두시다니."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팔을 움직여서 쏟은 게 뻔한데, 미주 탓을 하다니. 저 팔의 움직임을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봤어도 아무 말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주, 손 좀 보여줘."
미주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손등 전체가 붉게 부풀어 있었다. 심하게 화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열기가 퍼진 것처럼 벌겋게 달아 있었다.
"어의를 불러야겠어."
"왕녀 전하."
윤지수가 끼어들었다.
"시종 때문에 어의까지 부르시는 건 궁의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시종은 시종 처소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두는 게 원칙이랍니다."
원칙이라는 말이 이렇게 편리하게 쓰이는구나. 다칠 때는 우연이고, 치료할 때는 원칙이라니. 이렇게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면 아까 그 팔 동작도 우연이 아니었겠지.
"제 시종이 크게 다쳤는데, 그 원칙이 우선인가요?"
"규율이란 그래서 존재하는 겁니다. 개인 감정으로 어기면 안 되죠."
한혜원이 거들었다.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나를 몰아세우는 게 눈에 보였다. 한 명이 찌르면 다른 한 명이 마무리를 짓는 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연습해 온 것처럼 매끄러웠다.
좋아, 규율 좋아하시네. 너네가 만든 사고에 너네가 만든 규율 갖다 붙이는 거, 그거 되게 편리하다.
나는 미주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왕녀 전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이 이렇게 다쳤는데 규율 따지고 있을 순 없지. 나 원래 그런 거 못 참는단 말이야……
중정을 벗어나 복도를 걸으면서도 미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미주가 더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전하, 그렇게 빨리 안 걸으셔도……"
"빨리 가야 빨리 치료받지."
나는 미주를 데리고 곧장 어의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어의는 자리에 있었고, 미주의 손에 약을 발라주었다. 약이 닿는 순간 미주가 어깨를 움찔했다.
"많이 놀랐지."
"전하, 저 때문에 곤란해지시면 어떡해요……"
미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작 자기가 아픈 건 그새 잊은 얼굴이었다.
"곤란해지는 게 무섭다고 사람을 그냥 뒀으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미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란 얼굴이었다. 마치 이런 말을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했다.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건지. 다친 사람 치료받게 하는 게 뭐 그렇게 특별한 일이라고.
어의당을 나서면서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원칙이니 규율이니 하는 말들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이 궁에서는 다치는 것도, 다친 사람을 돕는 것도 다 계산 속에서 움직이는구나. 그 계산에서 나는 이미 잘못된 답을 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알게 되었다. 규율을 어긴 일이 결코 조용히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방에 앉아 미주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참이었다. 창밖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방 안의 등불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왕녀 전하."
방문 밖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상궁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낮과는 전혀 다른 온도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