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생했더니 정빈 후보랍니다

2화

궁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최대한 조용히 지냈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시종 김미주가 가져다주는 정보들로만 궁 안의 사정을 파악했다. 낯선 곳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다. 나는 이 궁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하나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숨을 죽이는 게 맞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창밖 풍경만 관찰하는 것도 나름 할 만한 일이었다. 정원의 나무들, 지나다니는 궁녀들의 걸음걸이, 문 여닫는 소리까지도 다 정보였다. "정빈 후보는 총 세 분입니다. 왕녀 전하 외에 윤지수 아가씨, 한혜원 아가씨가 계세요." 미주는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였는데, 궁 생활은 훨씬 오래된 눈치였다. 말투에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문장 끝을 흐리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오래 버틴 사람 특유의 습관이겠지. "두 분 다 만만치 않으세요. 윤지수 아가씨는 재상가와 가까운 명문가 출신이시고, 한혜원 아가씨는……" 미주가 말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방문 쪽을 한 번 살피는 것까지 봤다.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조상궁님과 친분이 두터우세요." 조상궁. 이 이름이 벌써 몇 번째 나오는지 모르겠다. 미주가 정보를 전달할 때마다 이 이름은 꼭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마치 이 궁의 모든 길이 그 사람 앞에서 한 번씩 꺾이는 것처럼. "조상궁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후궁 안에서는 절대적이세요. 왕세자 전하도 그분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신다고……" 미주가 여기서 목소리를 아예 속삭임 수준으로 낮췄다. 나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귀를 세웠다. "조상궁님 눈 밖에 나면, 궁 생활이 아주 고달파진다고들 해요." 그렇다는 건 내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알겠어, 최대한 피하자. 리스트에 하나 추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 이 목록이 벌써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벌써 지뢰밭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윤지수, 한혜원. 두 이름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언젠가 마주치게 될 테니 미리 알아두는 게 좋다. 적어도 누가 누구 편인지는 구분해야 실수를 안 하지. 미주는 그 뒤로도 몇 가지 소소한 정보를 더 흘려주었다. 어느 궁녀가 입이 가볍고, 어느 대전이 새로 지어져 아직 낯이 익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 그리고 후궁 안의 식사 시간이 생각보다 엄격하게 지켜진다는 것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조용히 받아 적듯 마음에 새겼다. 이 사흘 동안 나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처럼 만들었다. 존재감을 최소화하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이현이 나를 불렀다. "왕세자 전하께서 별당으로 오라 하십니다." 드디어 왔구나. 첫 대면.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긴장이라기보다는, 뭔가 확인받는 기분이랄까. 이 결혼이라는 게 정말로 실체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서류상의 숫자에 불과한 건지 곧 알게 될 참이었다. 나는 최대한 단정한 옷을 골라 입고 별당으로 향했다. 미주가 옷매무새를 몇 번이고 매만져 주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이 자리가 그녀에게도 부담스러운 자리라는 걸 알았다. 나만 긴장한 게 아니었다. 별당으로 가는 길, 복도는 유난히 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 바닥이 낮게 삐걱거렸다. 그 소리조차 크게 느껴졌다. 이현은 창가에 서서 나를 등지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넓은 등, 흐트러짐 없는 자세. 방 안 공기가 그의 존재감만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앉으시오." 짧은 명령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등받이도 없는 작은 의자였다. 아, 이것도 뭔가 상징적인 건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편히 앉지 말라는 뜻인가.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을 때, 나는 그의 표정에서 냉기를 느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완전히 차단된 얼굴. 눈매가 날카로웠고, 시선은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무표정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겠소. 나는 정빈을 들일 마음이 없소."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보통은 최소한의 예의상 인사 몇 마디는 나누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나. 이 사람은 그런 절차 자체를 아예 생략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대는 이 궁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적당한 시기에 물러날 준비를 하시오." 와, 대단하다. 만나자마자 손절을 통보하는구나. 이렇게 신속하고 효율적인 이별 예고는 또 처음이었다. 어디서 배운 거지, 이 화법은. 하지만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오갔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무심하게. "알겠습니다."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이 사람은 내가 울거나, 아니면 화를 내며 따지고 들 거라고 생각했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데 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놀랍지 않소?" "뭐가요?" "내가 방금 한 말이." 나는 어깨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이 정도 통보에 놀랄 만큼 순진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저도 이 자리를 원한 적 없어요. 서로 원하는 게 같으니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요."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꽤 오래 이어졌다. 마치 내 말 속에서 숨겨진 함정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천천히 내 얼굴을 훑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냈다. 이런 자리에서 눈을 피하면 괜히 없는 약점을 만드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조건이 있소." "말씀하세요." "내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마시오. 다른 후보들과 다투지도 말고, 궁의 규율을 어기지도 마시오. 그러면 나도 그대를 건드리지 않겠소." 서로 상관하지 말자는 거잖아. 그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그림인데. 이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어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애매하게 남겨두는 것보다 이렇게 규칙을 정해두는 게 나로서는 훨씬 편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의 눈에 잠깐 의아함이 스쳤다. 아마 이렇게 순순히 넘어갈 거라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계약서에 도장 찍듯 담백하게 응하는 나를 보며, 그는 뭔가 더 캐물으려는 듯 입을 살짝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대면은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의 말도, 인사도 없었다. 그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걸 신호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별당을 나섰다. 별당을 나서면서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고, 그렇게 여겼다. 최소한의 규칙만 지키면 조용히 지낼 수 있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이 낯선 나라에서 원하는 건 딱 그 정도였으니까. 괜한 관심도, 괜한 애정도 필요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물처럼 흘러가고 싶었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아까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완전히 차단된 얼굴. 그런데도 그 눈빛 어딘가에 미세한 균열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가.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가. 어쨌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 결혼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니까. · 나는 방으로 들어서는 이서윤을 다시 바라보았다. 예상 밖이었다. 대부분의 후보들은 이런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아니면 반발했다. 자신의 가문을 앞세워 협박하듯 매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지난번 후보 중 한 명은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꿀 뻔했다. 나는 그런 반응들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왕녀는 담담했다. 마치 이 상황이 자신에게도 편한 결과라는 듯한 태도였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떨림도 없었고, 눈빛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설국의 제1왕녀. 정치적 볼모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여자가 이렇게 여유로울 이유가 없었다. 이 결혼이 실패하면 그녀의 나라와의 관계도, 그녀 개인의 입지도 모두 흔들릴 텐데. 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반응했다. 뒤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나는 창밖으로 그녀가 별당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걸음걸이에 조급함이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 보통 이런 자리를 끝내고 나가는 사람들은 어깨가 축 처지거나, 혹은 화를 못 이겨 걸음이 빨라지는데, 그녀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다혜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아직 판단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괜한 억측으로 다혜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여자,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녀가 사라진 복도 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결혼을 처음부터 성가신 짐으로만 여겼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 이상하게도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저 여자의 담담함이 진짜인지, 아니면 철저히 계산된 연기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만약 후자라면, 이건 생각보다 훨씬 골치 아픈 상대를 들인 셈이 된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