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생했더니 정빈 후보랍니다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향이었다. 침향인지 뭔지, 코끝이 아릴 정도로 진한 냄새가 방 안 가득했다. 살짝 매웠고, 살짝 달았다. 죽은 사람한테서도 이런 냄새가 나나?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는데.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부적이 타는 냄새와 누군가의 발길질이었다. 그 발길질, 진짜 아팠는데. 저주술사 나부랭이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비웃으며 나를 끌고 갔다. 열일곱 살이었다. 억울해서 눈물도 안 나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물이 나긴커녕 코끝이 향으로 간지러웠다. 이상하잖아, 이거. 나는 이상할 정도로 폭신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손을 들어 보았다. 가늘고 하얀 손이었다. 손톱까지 정갈하게 다듬어진, 평생 흙 한 번 안 만져본 것 같은 손. 내 손이 아니었다. 내 손은 원래 갈라지고 상처투성이였는데. 부적 만들다 데인 흉터도 있었는데. 그게 하나도 없었다. "왕녀 전하, 깨셨습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내 몸이 아니라는 걸. 아니, 지금은 내 몸이라는 걸. 뭐야 이거, 몸을 바꿔 태어난 거야? 방문이 열리고 궁녀 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화려한 치마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돌았다. "괜찮으십니까? 어의를 부를까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 방금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왔는데. 심지어 이불이 너무 부드러워서 어지러운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나는 대신 고개를 저었고, 궁녀는 안심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날 오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설국 제1왕녀 이서윤. 아명은 라온. 나이는 열아홉. 정치적 사정으로 청명국 왕세자 이현의 정빈 후보로 시집오게 된 몸이었다. 원래 이서윤은 며칠 전 열병으로 쓰러졌고, 그 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셈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다가 갑자기 딴 사람이 들어앉은 걸 알면 궁녀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지만 궁금해할 처지가 아니었다. 왜 나였을까. 그런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서윤의 몸에는 이서윤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흐릿한 감각만, 파편처럼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 궁의 냄새, 그리고 청명국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가 쥐여준 옥가락지 하나. 가락지는 지금 내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만져보니 차가웠다. 그 차가움만이 유일하게 진짜처럼 느껴졌다. 어쩌겠어. 이렇게 된 거.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선 나라, 낯선 궁, 낯선 몸.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조차 낯설었다. 나무 모양도, 새 우는 소리도, 다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살아 있잖아. 그거면 됐어. 전생에서 나는 저주술사였다. 사람들은 나를 불길하다고 했고, 마을에서 쫓아냈고, 결국 죽였다. 죽기 직전에도 나는 딱 하나만 생각했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다고. 남들 눈에 띄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싶었다고. 그 소원이 이렇게 이루어진 건가. 왕세자의 정빈 후보라는 자리가 조용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저주술사였던 삶보다는, 왕녀였다가 팔려가는 삶이 훨씬 낫지 않겠어? 적어도 돌 맞아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실은 계속 불안했다. "전하, 청명국으로 출발하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궁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랄 게 뭐가 있나. 몸도 내 몸이 아닌데, 짐이야 다 챙겨져 있고 나는 그냥 실려 가면 되는 거잖아. 가는 길은 멀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원래도 차멀미가 심했는데, 이 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마차 안에서 이서윤의 흐릿한 기억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어머니의 손. 낮은 목소리로 "몸조심하렴, 라온아" 하고 말하던 순간.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리고 다짐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이 궁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것이다. 그게 내 목표였다. 딱 하나, 조용히 사는 것.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소원. 이번엔 반드시 이룰 거였다. 왕세자비면 뭐 어때. 눈에 안 띄면 되는 거지. 잘 웃고, 잘 순종하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게 만들면 되는 거야. 청명국 왕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목표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궁문이 열리는 순간, 화려한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붉고 금빛 나는 옷자락이 줄줄이 늘어선 걸 보니, 이 나라가 얼마나 위세를 부리는 나라인지 짐작이 갔다. 그 가운데 짙은 흑발과 투명한 청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있었다. 장신이었다. 자세가 곧았고, 표정에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조각처럼,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정지된 얼굴이었다. 저 사람이구나. 왕세자 이현. 심장이 괜히 빨리 뛰었다. 마차 안에서부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압적인 존재감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릎이 살짝 떨렸는데, 그게 멀미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뭔가를 읽었다. 호기심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미묘한 감정. 저게 뭐지. "먼 길 오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형식적인 인사였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본 읽는 듯한 말투.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청명국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형식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싶었다. 이 이야기가. 조용히 살고 싶다는 소원과는 정반대의 자리에서. 그의 눈빛이 잠깐 나를 훑고 지나갔다. 아주 짧은, 스치는 시선이었는데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마치 내가 이서윤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착각이겠지. 그럴 리 없잖아. 나조차 며칠 전까지 몰랐던 사실을, 저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 그렇게 애써 생각을 접었지만, 그 시선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마치 저 사람 앞에서는,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겠다는 내 다짐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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