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일주일이라는 시한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새벽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달력을 봤다. 손톱으로 하루씩 그어가며 세는 것도 이제 습관이 됐다.
'육 일, 오 일, 사 일…….'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첫 급료를 받는 날, 나는 사람 없는 뒤뜰 구석에서 몰래 봉투를 열어봤다.
두꺼운 종이봉투 안에 든 지폐 몇 장. 세어보는 데 삼 초도 안 걸렸다.
'…이게 다야?'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로, 웃겼다.
준서 오빠가 갚아야 할 돈에 비하면 이건 코끼리 앞의 모래알이었다. 아니, 모래알이라고 하기도 아까웠다. 모래알은 그래도 눈에 보이니까.
'이걸로 뭘 어떻게 갚으라고. 백선가 애들이 이거 보고 웃지 않을까? 아니, 웃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화낼 것 같은데.'
그날 밤 나는 숙소 구석에서 촛불 하나 켜놓고 짧은 편지를 썼다.
글씨가 삐뚤빼뚤했지만 고칠 여유가 없었다. 손끝이 시렸다.
시한을 조금 늦추고, 이자로 우선 급한 불을 끄자는 내용이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최대한 계산적으로.
접은 편지를 몰래 심부름꾼 손에 쥐여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거 뜯어보고 웃으면 어떡하지. 아니 뜯어보고 화내면 어떡하지.'
답은 없었다. 그냥 보내는 수밖에.
답장은 이틀 뒤에야 왔다.
빚쟁이들이 시한을 보름 연장해줬다는 소식과 함께, 준서 오빠의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무리하지 마라.'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씨체가 익숙해서 더 눈에 밟혔다.
'무리 안 하면 집 넘어가는데 무슨 소리야, 진짜.'
목이 메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곧바로 손등으로 지워버렸다.
지금은 울 시간도 아까웠다. 눈물 닦을 시간에 일 하나 더 하는 게 남는 거다.
편지를 소매 안에 넣고 다시 청소 도구를 챙기러 가는 길,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버는 돈으로 언제 다 갚아? 십 년? 이십 년?'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답은 뻔했다. 평생 못 갚는다.
'그럼 다른 수를 찾아야지.'
돌이켜보면 처음엔 이 저택에서 몇 주만 버티다가 돈을 모아 돌아갈 계획이었다.
소박하다면 소박한 계획. 메이드 몇 달, 급료 모으기, 그리고 조용히 사라지기.
하지만 유해원 부인을 다시 만난 뒤로, 나는 그 계획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자네, 돈이 급하지?"
뒤뜰에서 또 마주친 그녀가 대뜸 물었다.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자세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늙은 여우, 딱 그 느낌.
'이 할머니 눈치가 왜 이렇게 좋아. 관상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솔직하게 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숨겨도 들킬 거였다.
"메이드 급료로는 답이 안 나올 텐데."
정곡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유해원 부인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규칙적이었다. 마치 나를 어디로 몰아붙이려는 신호 같았다.
"내가 아는 저택들이 많아. 메이드가 부족한 곳도 많고. 소개만 잘 해줘도 소개비가 짭짤하지."
"소개비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메이드 소개소를 하나 차려볼까 하는데, 자네 같은 애가 필요해서."
순간 머릿속에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
인력 파견 회사. 사람을 필요한 곳에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구조. 야근에 시달리면서도 매달 매출표를 뽑던 그 사무실 풍경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거 완전 파견업체잖아. 세계관 바뀌어도 사람 굴리는 방식은 똑같네.'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자네는 이 바닥 사람들 성향을 잘 파악하잖아. 며칠 안 됐는데도 벌써 눈치가 그럴듯해."
그녀의 말이 전부 옳았다. 나는 이미 이 저택 안에서 누가 위험하고 누가 안전한지 나름의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누구는 뒷담화를 좋아하고, 누구는 실수를 절대 용서 안 하고, 누구는 겉으로만 착한 척한다는 것까지.
전생 파견직 시절에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어느 조직에 들어가든 사람 파악이 생존의 절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냥 살려고 배운 건데, 여기서도 쓸모가 있네.'
"해보겠습니다."
대답은 이번에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했다.
"단, 조건이 있어."
유해원 부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도 멈췄다.
"자네 진짜 이름과 출신, 나한테는 숨기지 마. 대신 나도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해."
등골이 서늘해졌다. 결국 이 사람은 이미 뭔가 눈치를 챈 것이다.
'역시. 이 할머니,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진짜로 들릴 리는 없는데도.
"…제가 뭘 숨긴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글쎄. 그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
그녀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더 무서웠다.
"그리고 자네가 살 곳도 하나 마련해줄게. 가짜 주소로. 소개소 등록할 때 그게 필요할 테니."
그녀는 이미 모든 걸 계산해 둔 사람처럼 말했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하듯 담담하게.
'준비성 하나는 인정한다, 진짜.'
나는 그 순간, 이 생활을 며칠 안에 정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탈출은 물 건너갔다. 이제부터는 그냥, 살아남는 거다.'
속으로 되뇌면서도 씁쓸했다. 원래 계획은 조용히 스며들어 돈만 챙겨서 튀는 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이 판에 발을 담근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확실하게 챙겨주세요."
"확실하게 챙겨주지. 나는 빈말 안 해."
유해원 부인이 지팡이를 다시 짚으며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여유로워 보였다. 이미 이긴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저 할머니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냥 이용하기 좋은 패로 보이나.'
상관없었다. 지금은 패라도 뭐든 되어야 했다. 오빠 빚을 갚으려면.
마음을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복도는 평소보다 어두웠다. 촛대 몇 개가 꺼져 있었는지 발밑이 잘 안 보였다.
발걸음을 서두르던 중, 복도 끝에서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거기, 새로 온 메이드."
돌아보니 금발에 자주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존재만으로 눈이 부신 듯한 기품이 느껴졌지만, 그의 눈빛만은 웃음기와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웠다.
옷차림부터 이 저택의 사용인들과는 결이 달랐다. 단정하게 각 잡힌 셔츠, 흠 하나 없는 구두. 딱 봐도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었다.
'뭐지, 저 사람은. 여기서 저런 옷 입고 다니는 사람 처음 보는데.'
"…네?"
목소리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서연이라고 했나."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마른침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삼켜지지 않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나 소개받은 적도 없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몰랐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사람, 뭔가 알고 온 눈빛이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인사를 해야 하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