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영애인데 메이드 중입니다

4화

숙소에 짐을 푼 첫날 밤, 소연은 침대에 누워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좁은 방에 이층 침대 두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창문 틈으로 밤바람이 훅훅 들어왔다. 벽지는 누렇게 바랬고 천장 어딘가에서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와중에도 소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 있었다. "여기 도련님들 진짜 잘생겼거든. 특히 셋째 도련님, 남궁준서 님. 남청색 머리에 눈이 완전 바다색이야. 실물로 보면 그냥 넋 놓는다니까." '그건 나도 봤어, 오다가.' 정원에서 얼핏 본 남자 하인 복장의 사람이 사실 남궁준서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남장한 영애를 안고 있던 그 사람. 그때 스쳐 지나가면서는 그냥 잘생긴 하인인가 보다 했는데. "저기 진짜야? 하인 복장으로 다니는 것도 봤는데." "응, 그거 취미래. 원래 저택 안에서도 신분 감추고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시나 봐. 이상한 도련님이야." '취미로 신분을 숨긴다고? 팔자 좋으시네, 진짜.' 나는 속으로만 비웃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소연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근데 아까 정원에서 이상한 영애를 봤는데."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묻는 척했지만 심장은 이미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소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방금까지 신나서 떠들던 얼굴이 반쯤 지워졌다. "그 얘기는 하지 마." "왜?" "여기서 그 영애 얘기하다가 조용히 사라진 메이드가 한둘이 아니야." '사라졌다는 게 그만뒀다는 뜻이길 바란다, 진짜로.' 소연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아까 그 정원에서 본 장면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분명히 남장한 영애였는데, 그것도 남궁준서라는 사람 품에 안겨 있던. '저택 안에 뭐가 있는 거야, 대체.' 문이 조용히 열렸다. 미래라는 또 다른 메이드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이는 스물을 조금 넘긴 듯했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손에는 갈아입을 앞치마 뭉치를 들고 있었다. "신입이니? 조심해야 할 게 있어." 미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다른 메이드들이 깰까 봐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이 저택에서 오 년 전에도 초록의 숙녀 출신 메이드가 하나 있었어. 신분 숨기고 들어왔는데." 등줄기가 저릿했다. "그,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발각됐어. 그리고 며칠 뒤에 마차 사고로 죽었대." 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벽 어딘가에서 나던 쥐 소리조차 멈춘 것 같았다. '사고사라는 거, 그거 백 프로 사고 아니지.' 미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얘기하는 투였다. "초록의 숙녀가 신분 숨기고 노동하는 건 국법 위반이야. 발각되면 본인도, 숨겨준 가문도 다 끝장나. 그래서 이 바닥엔 그런 소문이 종종 돌아. 누구는 정체 들켜서 사고로 죽고, 누구는 통째로 사라졌다고." "그, 그런 일이 자주 있어요?" "자주는 아니고. 그냥 몇 년에 한 번씩. 근데 그게 더 무서운 거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까." 미래는 별생각 없이 툭 던지고는 다시 앞치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얘기인데 저 사람한테는 그냥 흘러가는 잡담인가 보다. '와, 완전 반복되는 죽음의 굴레잖아, 이거.' 농담처럼 생각했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오히려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 "그럼 여기 오래 있어야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겠네요." "그렇지. 근데 넌 왜 그렇게 놀라? 설마 너도—" 소연이 감았던 눈을 슬쩍 뜨며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눈앞이 순간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무서운 얘기라 그렇죠." 최대한 태연하게 웃어 보였지만, 등에는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손톱 끝으로 이불깃을 꾹 눌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이 떨리는 게 들킬 것 같았다. 소연과 미래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행히도. 미래는 앞치마를 정리한 뭉치를 옷장 안에 넣고는 곧 불을 끄고 나갔다. 방 안이 어둠에 잠기고서야 나는 겨우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들키면 죽는 거네, 이거. 완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도 눈은 자꾸 감겼다. 몸은 지쳤고 마음은 불안했다. 그 두 가지가 뒤섞인 채로 나는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저택 뒤뜰에서 빨래를 널다가 낯선 노부인과 마주쳤다.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워서 손끝이 벌써 얼얼했다. 시트를 널고 있던 참이었는데, 지팡이 짚는 소리가 뒤에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던 그녀는 나를 지나치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옷차림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검소한 듯하면서도 옷감의 질이 남달랐다. "머리색이 참 곱네." '붉은 염색약 값이 좀 비싸긴 했지.'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시트를 든 손이 조금 굳었다. "이서연이라고 했나." 그녀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신입 메이드 이름까지 이미 파악하고 있는 노부인이라니. '설마 여기 매일 오는 사람인가.' 그녀는 유해원. 이 근방에서 이름난 미망인이라고, 나중에 미래가 알려줬다. 남편이 죽고 혼자 지내며 이런저런 저택을 드나드는 사람이라 했다. 남작가 출신이라던가, 아니면 백작가와 먼 인척이라던가,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 근방 저택들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자네, 눈빛이 남다르군." 유해원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오래 쳐다봤다.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마치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마치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시트를 너는 척 계속 손을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이미 도망칠 궁리로 가득했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자연스러울까. "그냥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입니다."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시선도 살짝 피했다. 너무 당황한 티를 내면 안 되니까. "그래. 열심히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하는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빨래를 든 채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왜인지 그 노부인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냥 지나가는 인사치고는 너무 오래 쳐다봤고, 너무 정확하게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노부인이겠지, 아니면 뭔가 알고 있는 걸까.' 확신할 수 없는 채로, 나는 다시 젖은 시트를 널기 시작했다. 손끝이 시큰거릴 만큼 찬물이었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빨랫줄에 걸린 시트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 너머로, 저택 창문 하나가 슬쩍 열리는 게 보였다. 누군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겠지. 그냥, 착각이어야 해.' 하지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그 서늘한 느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