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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걸로 머리를 물들이면 된다더구나." 준서 오빠가 내민 병 안에는 짙은 붉은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병목을 감싼 마른 헝겊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이런 걸 구했어?" "수도 뒷골목 상단에서. 신분 숨기고 일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쓴다더라." '와, 이 나라도 위장 취업 시장이 있었네.' 전생에도 가짜 학력, 가짜 경력으로 취업 준비하던 애들 많았는데. 여기라고 다를 게 없구나. "이거 바르면 진짜 안 들켜?" "완벽하진 않아. 그래도 초록이 아니면 다들 눈여겨보지 않을 거다." 준서 오빠는 병을 내 손에 쥐여주며 덧붙였다. "일주일이면 색이 빠질 거라더군. 그 안에 끝내야 해." 일주일. 그 안에 백작가 저택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소리였다. 말은 참 쉽게 나오는데. 계획은 이랬다. 나는 백선가 영애 백서아가 아니라, 고아 출신 평민 '이서연'이 되어 도시로 나가 일을 한다. 초록 머리는 이 나라에서 초록의 숙녀임을 증명하는 표식이니, 붉게 물들여 감추기로 했다. 메이드 소개소에 등록해 귀족 저택에서 일하며 급료를 모으고, 그 돈으로 일주일 안에 급한 불을 끈다. 말은 간단했지만 실행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일단 신분증부터 문제였다. 준서 오빠가 뒷돈을 써서 가짜 서류를 구해 오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방 안에 처박혀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러다 진짜 시간 다 잡아먹으면 어떡하지.' 초조함이 등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염색약을 머리에 바르는 동안 손끝이 계속 떨렸다. '초록 머리로 십육 년 살았는데 갑자기 빨간 머리 되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 붓끝으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훑는데, 손등에 붉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피를 뒤집어쓰는 것 같아서 잠깐 속이 울렸다. '이게 뭐야, 무슨 처형장 분위기야.' 거울 속에 비친 붉은 머리의 낯선 여자는, 확실히 백선가 영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네, 그럼.' 색이 다 배어들기까지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그동안 준서 오빠는 방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다 됐어?" "몰라,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그야말로 남이었다. 초록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원래의 나를 증명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색이 있는 안경알 하나 끼워 넣으니 그럴듯하게 감춰졌다. 소개소에 등록하는 날, 나는 신분증 대신 준서 오빠가 뒷돈을 써서 구한 가짜 서류를 내밀었다. 이서연, 열여섯 살, 남부 지방 고아원 출신. 소개소 담당자는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서류를 받아 챙겼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담당자는 그중 몇 장을 뒤적이다 내 것을 옆으로 빼놓았다. "고아원 출신이면 손버릇 나쁜 애들도 많던데." '뭐래, 이 아줌마가.' "저는 아닙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신경 썼다. 담당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남궁 백작가에서 급하게 메이드를 구한다는데, 갈래요?" "네, 하겠습니다."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갔다. 배부른 고민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담당자가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탕, 탕. 그 소리가 내 심장 뛰는 소리랑 겹쳤다. "내일 아침에 저택으로 바로 가면 돼요. 정문에서 이름 대면 안내받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소개소를 나오면서 나는 서류 사본을 품에 꼭 쥐었다. 이 종잇장 한 장이 지금 내 유일한 신분이었다. 남궁 백작가는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근위기사단장이 가주였고, 삼남 남궁준서가 아직 미혼으로 저택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준서 오빠랑 이름이 똑같네.' 잠깐 헷갈릴 것 같아서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남궁 준서, 남궁 준서. '귀족 도련님 뒤치다꺼리라, 딱 나 전생에 하던 일이잖아. 상사 비위 맞추기.' 웃기게도 그 생각이 조금 위안이 됐다. 전생에 부장님 커피 심부름, 회의 자료 복사, 눈치껏 웃어주기. 그런 걸 하면서 십 년 넘게 버텼는데, 이 정도쯤 못 하겠어? 저택 정문에 도착한 첫날, 나는 정원을 가로지르며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렸다. 대리석 분수, 손질된 장미 정원, 회랑을 따라 늘어선 조각상들. '이게 다 한 집 정원이라고?' 전생 회사 로비도 이렇게 화려하진 않았다. 분수 물줄기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고급스럽게 들렸다면 착각일까. 장미 정원 사이로 정원사 몇 명이 벌써 나와 가지를 치고 있었다. 저 장미 한 송이만 팔아도 내 급한 불 절반은 끌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이내 지워졌다. 도둑질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원 안쪽, 나무 그늘 사이로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남장을 한 사람과 어떤 영애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멀리서도 옷차림의 격차가 느껴졌다. 한쪽은 화려한 예복, 한쪽은 남자 하인 복장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로 살짝 몸을 숨겼다. '뭐야, 저거 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심장이 괜히 빨리 뛰었다. 두 사람의 자세는 누가 봐도 연인의 것이었다. 영애 쪽이 남장한 사람의 목을 끌어안고, 남장한 쪽은 그 등을 조심스레 감싸고 있었다. 하인 복장을 한 이의 손끝이 영애의 허리춤에서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영애의 얼굴이 나를 향해 살짝 돌아갔다.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영애의 표정이 이상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완전히 다른 걸 말하고 있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가 눈동자 깊은 곳에 스쳐 지나갔다. '저거 뭐야, 완전 딴 세상 표정인데.' 한쪽 얼굴로는 다정을 연기하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경멸을 흘리는 사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나를 발가벗겨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네가 뭘 봤는지 알아' 하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나는 괜히 눈을 피했다가 다시 정면을 봤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면 더 의심받을 것 같았다. 영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순식간에 다시 화사한 얼굴로 돌아갔다. "거기 새로 온 메이드니? 조심해서 다녀." 목소리는 나긋했다.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는데, 그 목소리 뒤에 숨겨진 온도는 전혀 다른 것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최대한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저런 사람은 무조건 멀리해야지.' 옆에 있던 남장한 이는 아예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저 사람도 뭔가 사정이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알 바 아니었다. 나부터 살아야 했으니까. 귀족 사회란 게 표면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나는 저택에 들어선 첫날부터 확인한 셈이었다. 전생에서도 사무실 정치는 지긋지긋하게 겪었지만, 여기는 그 판이 통째로 더 크고 위험한 것 같았다. '잘못 걸리면 잘리는 게 아니라 목이 날아가는 세계잖아, 여긴.' 정원을 벗어나면서도 등 뒤로 그 눈빛이 계속 따라붙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까 했다가 그냥 참았다. 돌아보는 순간 뭔가 더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안내를 맡은 하녀장이 나를 부엌 뒤편 숙소로 데려갔다. 복도를 걸으며 하녀장은 저택 규칙을 줄줄 읽어 내려갔다.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잠자리에 들고, 누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귀에 다 들어오진 않았지만 일단 고개는 계속 끄덕였다. 좁은 방에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이미 짐을 풀고 있던, 나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나를 힐끔 봤다. "새로 왔어? 나는 소연이야. 잘 지내보자." 웃는 얼굴은 편해 보였지만, 방금 본 영애의 이중적인 표정이 자꾸 눈앞에 겹쳐 보였다. '이 애도 겉과 속이 다를까.' 소연이 내민 손을 잡으면서도 나는 그 웃음의 진짜 뜻을 가늠하려 애썼다. 손바닥은 따뜻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앞으로 여기서,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거지.' 창밖으로 저택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방금 본 그 나무 그늘이 여기서도 아주 잘 보였다. 나는 커튼을 슬쩍 당겨 시야를 가리며, 앞으로의 일주일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온몸으로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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