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 악역, 다시 살아보겠습니다

4화

한도영이 딸의 방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이었는데, 서쪽 창으로 스며드는 마지막 빛이 방 안의 가구들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흠 하나 없는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옷깃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에는 급하게 말을 달려온 흔적인 듯 붉은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으니, 관청에서 딸이 물에 빠졌다는 전언을 받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의 뒤로는 하녀 하나가 따뜻한 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서 있었으나, 그는 손짓 하나로 그것을 물리고 방문을 닫게 했다. 딸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영아." 그가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방문을 들어서며 방 안을 훑어보는 눈빛만큼은 딸의 안색부터 손끝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는 듯 날카로웠다. 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서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불의 각도며 창문이 닫혀 있는지까지 확인하는 시늉을 했는데, 그것은 실은 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전에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습관이었다. 아영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아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예를 갖추며 답했는데, 그 정중한 말투에 한도영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평소의 아영이라면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며 어리광 섞인 투정을 부렸을 것이었고, 혹은 반대로 짜증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썼을 것이었다. 그는 딸의 침대 곁 의자에 앉으며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았고, 열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곧바로 안심하지 못했다. 손끝에 남은 딸의 체온이 지나치게 차분하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불안을 부추겼다. "몸은 괜찮으냐." "네,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어요. 어머니께서도 놀라셨을 텐데, 제가 먼저 찾아가 안심시켜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아영의 대답에 한도영은 잠시 말을 잃었는데, 그건 딸의 배려 자체보다도, 그 배려를 표현하는 방식이 지금까지 알던 딸과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에서 오는 당혹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렸는데, 그것은 그가 곤란한 사안을 앞두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버릇이었다. 관청에서 골치 아픈 상소문을 마주할 때도, 조정에서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힐 때도 그의 손끝은 늘 그렇게 움직였으니, 지금 그 버릇이 다름 아닌 열 살 딸 앞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 자신에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영아, 솔직히 말해 다오." 한도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물에 빠졌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머리를 어딘가 세게 부딪혔다거나, 이상한 것을 보았다거나." 그 질문에는 애정과 의심이 절반씩 섞여 있었는데, 아영은 그 저울의 눈금이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았다는 걸 감지했다. "딱히 이상한 걸 보지는 않았어요." 아영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냥,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갑자기 다 떠올랐어요. 그게 다예요."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유모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도, 오라버니 장난감을 부러뜨렸다고 거짓말했던 것도요." 구체적인 예시를 덧붙인 것은 순전히 계산이었다. 너무 짧고 추상적인 대답은 오히려 의심을 부를 뿐이었고, 사소한 잘못들을 나열하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한 각성처럼 들릴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말에 한도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딸의 대답이 지나치게 솔직하고 담백하다는 게 오히려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거짓을 꾸며대는 아이의 눈빛과는 분명 달랐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인 열 살 소녀의 말투와도 거리가 멀었으니, 그는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완전히 해가 저물면서 방 안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하녀가 밖에서 등불을 들이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손을 저어 물렸다. 이 대화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방에 들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거냐?" 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고요." 아영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냥 조금 늦게, 철이 든 거예요." 대답을 마친 뒤 그녀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는데, 그것은 열 살 아이가 흔히 짓는 순진한 시선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을 가늠하는 어른의 시선에 가까웠다. 한도영은 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시선을 거두었다. 그 대답이 오히려 한도영의 마음을 더 무겁게 눌렀다. 열 살짜리 아이가 저런 표현을 스스로 골라 쓴다는 것 자체가, 그의 경험으로는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 자신의 누이가 열병을 앓고 난 뒤 며칠간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던 기억을 떠올렸는데, 그때도 어른들은 다만 "놀란 게 아직 안 가셨나 보다"라며 넘겼을 뿐, 그 뒤로 누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말수를 줄이고 눈치가 빨라졌던 것을 아무도 깊이 캐묻지 않았던 일이었다. 지금 눈앞의 딸도 그런 것일까, 단순히 놀란 여파가 아이의 말투를 조숙하게 바꾸어놓은 것일까.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보려 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겉으로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지만, 방문을 나서는 그 뒷모습에서 아영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결정을 읽어냈다. 어깨의 각도, 걸음의 속도, 문고리를 잡는 손의 힘까지, 그 모든 것이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의 몸짓이었다. "내일 아침, 왕실 의관인 박현수를 부르겠다." 한도영이 문 앞에서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네가 정말 괜찮은지, 확실히 짚어보고 싶구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아영은 그 소리의 여운 속에서 오늘 자신이 넘긴 첫 번째 시험이 실은 두 번째 시험의 서곡이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실 의관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가 무엇인지, 그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 이름이 불려 나오는 순간부터 자신의 처지가 단순한 가족의 걱정을 넘어 공식적인 조사의 대상으로 넘어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둠이 내려앉은 천장을 바라보며 손끝을 가만히 움직여 보았다. 열 살짜리 몸에 걸맞은 서투름을 얼마나 더 흉내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왕실 의관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눈치챌 수 있는 자인지,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밤을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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