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연 왕국의 겨울은 유난히 길어서, 사람들은 첫눈이 내리는 날부터 마지막 서리가 걷히는 날까지를 헤아리며 한 해의 절반을 인내로 흘려보내는 데 익숙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이 계절이면 호숫가의 갈대는 이미 누렇게 말라, 바람이 지날 때마다 서걱서걱 마른 뼈처럼 부딪히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들으며 홀로 산책하는 것이 아영의 유일한 일과였다. 다른 귀족가의 영애들은 겨울이 오면 응접실에 모여 자수를 놓거나 다과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지만, 아영에게는 그럴 상대가 없었다. 그녀가 다가가면 자수틀 위의 손이 멈췄고, 웃음소리가 잦아들었으며, 이내 다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리를 비켰기 때문이다.
한씨 백작가의 별저를 둘러싼 이 호수는 저택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었는데, 아영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저택의 하인들은 그녀가 지나가는 기척만 들려도 몸을 움츠렸고, 나이 든 유모조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으며, 부모인 한도영 백작과 임소라 부인은 딸을 대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거리를 두었는데, 그 거리는 애정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얼마 전 백작이 다과 자리에서 넌지시 “아영아, 오늘은 온순하게 지냈느냐” 물었을 때도, 부인은 딸의 대답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화제를 돌리며 웃었다. 그 어색한 웃음을 아영은 이미 수백 번쯤 보아온 터였다.
악명은 아영이 다섯 살 무렵 시녀의 손등을 촛대로 내리찍은 사건부터, 열 살이 된 지금까지도 저택 안에 회자되는 여러 일화들로 쌓여 왔으며, 그 낙인은 이미 그녀의 이름보다 무거워져 있었다. 이웃 영지의 부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고 한다. “한씨 백작가의 그 영애 말이에요, 어찌나 성정이 사나운지 유모가 셋이나 그만두었다지요. 참으로 걱정되는 아이 아닙니까.” 걱정된다는 말은 입에 발린 것이었고, 실은 즐거운 구경거리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었다는 것을, 아영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악녀. 그것이 사람들이 뒤에서 부르는 그녀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날도 아영은 습관처럼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발밑의 낙엽을 짓이겼는데, 시녀 다혜가 조금 늦게 뒤따라오는 게 눈에 들어오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다혜야말로 그녀가 가장 자주 트집을 잡던 대상이었는데, 그저 걸음이 느리다는 이유로, 혹은 옷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기도 했던 소녀였다. “느리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아영은 지난주에도 그렇게 쏘아붙이며 다혜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친 일이 있었다. 그때 다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붉어진 뺨을 감싸며 고개만 숙였고, 아영은 그 굴복이 당연한 것인 양 지나쳤다.
아영은 뒤돌아 뭐라 쏘아붙이려던 참에 발밑이 미끈, 하고 꺾이는 걸 느꼈다. 젖은 이끼가 낀 바위였다는 걸 깨달은 건 몸이 이미 공중에 떠오른 뒤였고, 뒤이어 차갑고 검은 물이 온몸을 감싸며 삼켜버렸다.
숨이 막혔다. 폐 속으로 밀려드는 물의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고, 팔다리는 허우적거렸지만 무거운 겨울옷이 발목을 잡아끄는 통에 위로 떠오르지도 못했다. 물속은 생각보다 훨씬 어두웠고, 귓속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울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이 없었고, 발을 구르면 더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상하게도 다른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낯선 도로, 낯선 신호등,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거대한 트럭의 헤드라이트. 이서윤이라는 이름과,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어느 평범한 밤과,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던 순간과, 브레이크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찾아온 암전. 사무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결재 서류, 상사의 잔소리, 퇴근길 지하철역의 붐비는 인파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도 순서 없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는 열 살 소녀 한아영과 서른두 살에 트럭에 치여 죽은 회사원 이서윤이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못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에 어째서 이런 기억이. 아영은 스스로에게 물을 만한 여유조차 없었지만, 그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오랫동안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 믿어 왔던 몸이, 이서윤이라는 서른두 해의 생을 살아본 정신을 만나자 비로소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손끝이 물살을 가르고, 다리가 무거운 치맛자락을 걷어차며,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 수면 쪽으로 몸을 밀어 올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은 또렷했다.
악역이었어. 내가.
물 위로 얼굴을 내밀며 헛된 숨을 몰아쉬는 그 짧은 순간, 아영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 온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촛대로 내리찍은 시녀의 손등, 걸음이 느리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한 다혜, 부모의 다정함조차 의심하며 걷어차 버린 수많은 밤들, 유모가 그만두던 날 등을 돌리며 짓던 표정까지. 그 모든 것이 이제 회사원의 눈으로 다시 보이자, 손이 떨려 왔고 눈앞이 흐려졌다. 이건 방치하면 파멸로 끝나는 이야기다, 라는 직감이 스쳤다. 어디선가 읽었던, 혹은 보았던 이야기의 구조와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악녀로 낙인찍힌 영애가 끝내 몰락하는 결말, 그 결말의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 자리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아영은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것을 곱씹을 새도 없이 다시 물이 그녀를 끌어내렸다. 겨우 밀어 올린 몸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고, 팔다리에서는 이미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야 끝에 흐릿하게 비치던 회색 하늘마저 점점 멀어졌다.
누군가의 비명이 저 멀리서 들려온 건 그때였다. 다혜였다. 물에 빠진 영애를 향해 달려오며 목이 터지도록 사람을 부르는 그 소리를, 조금 전까지 뺨을 맞고도 아무 말 못 하던 그 소녀가 지르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영의 의식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