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는데,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아영을 맞이한 것은 낯익은 침실의 천장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러 개의 시선이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침대 머리맡의 가스등 유리를 스치며 흐릿하게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로 어머니 임소라는 창백한 얼굴로 딸의 손을 붙잡고 있었으며, 그 뒤로 유모와 하녀들이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모두의 눈빛에는 안도보다 두려움이 더 짙게 배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아이가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이 대신 돌아온 것을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아영은 마른 입술을 떼며 가장 먼저 물었다. "어머니, 제가... 걱정을 끼쳤나요." 그 순간 임소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는데, 딸의 입에서 저런 부드러운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걸 온몸으로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임소라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으며, 방 안은 순식간에 비명과 발소리로 뒤덮였다. 누군가는 물을 가져오라 소리쳤고,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라 외쳤으며, 그 소란 속에서 아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았다. 몸은 여전히 열 살 소녀의 것이었지만 그 안을 채운 정신은 서른두 해를 살아본 이서윤의 것이었다. 이 낙차가 만들어내는 이물감에 그녀는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손끝이 저리고 시야가 흔들렸는데, 그것이 단순히 몸의 문제인지 아니면 두 개의 삶이 한 몸 안에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마찰인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었다.
의사를 부르라는 외침이 저택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와중에, 아영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냉정하게 짚어보려 애썼다.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이 났을 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에도 그녀는 감정보다 먼저 상황을 분석하는 사람이었다. 부서 이동 통지서를 받았던 그날 아침도, 동료가 자신의 실적을 가로채고도 뻔뻔하게 웃던 그 회의실에서도,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보다 먼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계산했었다. 이번에도 그 습관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이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돌아왔다는 사실은,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녀는 곧 깨달았다. 몸은 어린 영애의 것이고 기억은 이 저택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기억의 주인이 더 이상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길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곧 불려온 의사는 맥을 짚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말을 흐리며 임소라를 향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충격으로 잠시 기억이나 성정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이렇게 온전히 달라지는 경우는 저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라..." 그 말끝이 흐려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더 무거워졌는데, 확신 없는 진단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아영은 그 광경을 침대에 누운 채 지켜보며, 이 세계에서는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줄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영애께서... 많이 놀라셨나 봐요." 유모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며 눈치를 살폈다. 그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이 집에서 온갖 풍파를 지켜본 사람 특유의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제가 미안하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사과드릴게요." 아영이 나직하게 답하자, 유모의 손에서 들고 있던 수건이 툭 떨어졌다. 유모는 떨어진 수건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잠시 아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 짧은 대사 하나가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얼려버렸다. 그 순간의 정적은 어떤 비명보다도 무거웠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도록 저택 안팎에서는 온갖 소문이 들끓었다. 어떤 하인은 영애가 정령에게 벌을 받아 넋이 나갔다고 수군거렸고, 어떤 하인은 물에 빠졌던 충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부엌 쪽에서는 "그 성정에 벌을 받아도 마땅하지" 하는 소리가 낮게 오갔고, 마구간지기는 "죽은 영혼이 들어앉았다더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된 결론은 하나였다. 예전의 한아영은 죽었고, 지금 이 방에 누워 있는 존재는 다른 무언가라는 것. 아영은 그 소문들을 하나하나 전해 들으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는데, 그것은 억울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확한 관찰에 가까웠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 정점에 달할 즈음, 아영은 마침내 방문을 열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다혜를 마주하게 되었다. 물에 빠진 그녀를 처음 발견하고 목이 터지도록 사람을 불렀던 바로 그 시녀였는데, 다혜는 쟁반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시선은 아영의 눈을 피해 방바닥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난 오 년간 아영에게 가장 자주 매질을 당했던 몸이 그 기억을 잊었을 리 없었다. 예전의 한아영이라면 발소리만 듣고도 몸을 움츠렸을 그 다혜가, 오늘은 억지로 등을 곧게 펴고 걸어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러 오는 걸음걸이였다.
"다혜." 아영이 이름을 부르자, 그 순간 다혜의 손에서 쟁반이 흔들려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놓쳐도 돼." 아영이 다가가 쟁반을 받쳐 들며 웃음을 지었는데, 그 짧은 손짓과 웃음 하나에 다혜는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손등에 남은 오래된 흉터 자국이 소매 밑에서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감춰졌다. "영, 영애님... 어디 아프신 게 아니세요?" 다혜가 겨우 짜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는 순수한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으며, 다혜 자신조차 어느 쪽이 더 큰지 가늠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물음이야말로 저택 전체가 아영을 향해 던지고 있는 진짜 질문이라는 걸, 아영은 그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든,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이 새로운 소문의 재료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