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 악역, 다시 살아보겠습니다

3화

다혜가 물러간 뒤에도 그 짧은 대화의 여운은 오래 남아, 아영은 침대 머리맡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를 바라보며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태피스트리에는 물결무늬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 문양이 촘촘히 짜여 있었는데, 그 무늬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정말로 호수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택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극진했지만, 그 이면에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시녀들은 문을 열 때도 노크 소리를 세 번씩 나누어 냈고, 식사를 나를 때도 그릇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건 애정이 아니라 관찰이었다. 아영은 이서윤으로서의 냉정한 판단력으로, 이 변화를 그저 다정함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의심을 부풀릴 뿐이라는 것을 사회생활 십여 년의 경험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그 미세한 균형을 잡는 일이, 이제는 그녀의 하루 전체를 지배하는 과업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저택의 시녀들이 부엌 뒤편에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영의 방 창문까지 들려왔다. 창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마당의 라일락 나무 잎사귀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시각이었다. "이번엔 진짜로 정령님의 축복이 아닐까?" 한 시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수에 빠져 다시 태어난 거라잖아. 청연 왕국에는 그런 전설이 있대, 물의 정령이 마음에 든 사람에게 새 삶을 준다는." 다른 시녀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예전 영애님은 죽고, 정령님이 새로운 영혼을 넣어주신 거지. 안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겠어." "그래도 좀 무섭지 않아? 갑자기 딴사람처럼 말투도 바뀌고, 눈빛도 달라지고." "무섭기보단 다행이지. 예전엔 하도 심술을 부려서 다들 곁에 가기 싫어했잖아." 그 이야기를 엿들으며 아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는데, 진실과는 한 치도 맞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얼추 비슷한 결론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령이 아니라 삼십 년 넘게 다른 세계를 살다 온 여자의 영혼이 스며든 것뿐이라고 정정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청연 왕국은 오래전부터 정령 신앙이 뿌리 깊게 박힌 나라로, 왕실조차 매년 정령제를 성대히 치르며 백성들의 안녕을 빌었는데, 그런 세계관 속에서라면 급작스러운 인격의 변화 역시 정령의 개입으로 해석되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을 어귀의 사당에는 물의 정령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고, 아이가 아프거나 곡식이 잘 자라지 않을 때도 사람들은 먼저 정령의 뜻을 물었다. 그런 소박한 신앙이 통용되는 건 평민들 사이에서였고, 귀족 사회는 전혀 다른 논리로 움직였다. 그들에게 정령이란 정치적 수사이자 의례일 뿐, 실제로 벌어진 이상 현상을 해석하는 잣대는 철저히 세속적이었다. 한씨 백작가는 청연 왕국 건국 초기부터 왕실을 섬긴 오랜 가문이었으며, 아버지 한도영은 국왕의 최측근으로서 궁정 내 파벌 다툼 한복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궁정에는 한도영을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늘 눈을 밝히고 있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사소한 흠집이었다. 백작가의 영애가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소문이 궁정에 흘러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정치적 약점이 되어 정적들의 손에 무기로 쓰일 수 있었다. 소문이란 본디 실체보다 무섭게 부풀려지는 법이어서, 열 살짜리 아이의 성격 변화 하나가 결국 가문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개인의 안위 문제가 아니었다. 명예. 그 한 단어가 아영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서윤으로 살던 서른 몇 해 동안, 그녀는 명예라는 단어를 그저 낡은 관념 정도로 치부하며 살아왔다. 회사에서의 평판, 동료들 사이의 신용 같은 것들이야 있으면 편하고 없어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달랐다. 한 가문의 명예와 정치적 입지가 열 살짜리 소녀의 갑작스러운 성격 변화 하나에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이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 하나의 처신이 아버지의 정치적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 그것은 낯설고도 무거운 감각이었다. 그날 오후, 저택의 정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며칠간 왕궁에 머물며 급한 정무를 처리하던 아버지 한도영 백작이, 딸이 물에 빠졌다는 급보를 받고 밤낮없이 말을 달려 돌아온 것이었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소리, 마차 바퀴가 자갈을 짓이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는 가운데, 아영은 창가에 서서 그 소란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말에서 내려서는 백작의 옷자락에는 며칠간 갈아입지 못한 흙먼지가 그대로 묻어 있었고, 걸음걸이에는 다급함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이 몸의 아버지구나. 아영은 창문 너머로 그를 내려다보며 낯선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이 그리움인지 경계심인지조차 스스로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저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그 눈빛에서 아버지의 애정보다 백작의 의심이 먼저 읽힌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삶에서 그녀가 마주해야 할 첫 번째 진짜 시험이 될 것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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