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행히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던 들짐승이었다.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던 순간, 유서윤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줄 알았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가, 튀어나온 것이 삵 한 마리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녹아내렸다.
'하필 이런 순간에.' 그녀는 생각했다. '하필 이런 물건을 손에 쥐고 있을 때.'
유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기장을 품 안에 숨겼다. 종이가 살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마치 그 자체로 무슨 죄를 짓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별채 문을 다시 걸어 잠그고, 자물쇠를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이 사실을 잠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소아에게조차.
'누구를 남긴 건지 알기 전까지는.' 그녀는 생각했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어.'
일기장의 마지막 문장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무도 믿지 마라. 대체 누가, 누구에게 남긴 경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문장이 유서윤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
며칠 뒤, 유서윤은 정식으로 궁정에 서한을 올리기로 결심했다. 무고함을 밝히려는 시도였다.
밤새 초를 세 개나 태워가며 문장을 다듬었다. 지나치게 격한 표현은 지우고,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표현도 지웠다. 딱 필요한 만큼만, 논리로 무장한 문장이어야 했다.
한소아를 통해 궁정 서기관에게 전달된 서한에는, 유서윤이 박세라를 해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와 함께, 증거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한소아가 서한을 몇 번이고 접었다 펴며 물었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유서윤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답변은 사흘 뒤에 왔다.
"서한은 잘 받았습니다." 궁정 서기관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마치 미리 준비된 대본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증거를 뒤집을 만한 물증이 없는 이상, 재심의는 불가능합니다."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정황은 이미 충분합니다." 유서윤이 따지듯 물었다.
"정황은 정황일 뿐입니다." 서기관이 딱 잘라 말했다. "물증을 가져오십시오."
물증. 그 두 글자가 유서윤의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물증이 없어서 갇힌 처지에, 물증을 가져오라니. 이건 어떻게 봐도 순서가 뒤바뀐 요구였다.
유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듯한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명백한 거부였다.
"박세라 양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다는 걸 몰라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한소아가 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한소아." 유서윤이 낮게 그녀를 불렀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서기관은 대답 없이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를 떴다. 마치 이 대화를 애초에 나눈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 무심한 뒷모습이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어." 한소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발로 바닥을 몇 번이고 굴렀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유서윤은 오히려 조용히 서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다. 궁정이 순순히 재심의를 받아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크지 않았다.
'정공법으로는 안 돼.' 그녀는 생각했다. '증거를 만들려면, 저들이 모르는 통로가 필요해.'
***
그날 밤, 유서윤은 별궁 창가에 앉아 한소아가 몰래 구해다 준 정보 하나를 곱씹었다.
창밖은 이미 캄캄했고, 등불 하나만이 방 안을 흔들리는 그림자로 채우고 있었다. 유서윤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쥔 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궁정 뒷골목에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궁정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
"어디서 이런 걸 구했어?" 유서윤이 물었다.
"물어보지 마." 한소아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나도 목숨 걸고 알아온 거니까."
그 대답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물러설 상황이 아니었다.
"위험할 수도 있어." 한소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런 자들이랑 얽히면. 소문에는 정보를 사고파는 자들 중 절반은 뒤로 다른 짓도 한다던데."
"알아." 유서윤이 답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한소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궁정도, 서기관도, 정공법도 모두 막혀버린 지금, 남은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유서윤은 별채에서 발견한 일기장을 다시 품에서 꺼냈다. 낡은 표지, 흐릿해진 잉크, 그리고 마지막 문장.
'아무도 믿지 마라.'
그 문장이 이제는 경고가 아니라 전략처럼 들렸다. 누군가는 저 문장을 쓰며 절망했을지 몰라도, 유서윤에게는 지금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지침이었다.
'믿지 말라는 건, 결국 스스로 알아내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유서윤은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정공법이 막힌 지금,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
"내일." 유서윤이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한소아는 대답 대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겁이 났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문턱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