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낙인의 밤, 진심을 쥐다

4화

그날 이후로 예지의 조각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찾아왔다. 어느 밤은 불타는 정원이 보였다. 붉은 꽃잎들이 재가 되어 흩어지는 장면이었다. 어느 밤은 황금빛 머리칼이 붉게 물드는 장면이 보였다. 누구의 머리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색채만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남았다. 유서윤은 그 장면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이미지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서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다 하나의 그림이라면.' 그녀는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밤마다 눈을 뜨면 이불이 젖어 있었다. 식은땀이었다. 시녀들은 그녀가 악몽을 꾸는 줄로만 알았고, 유서윤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악몽이라고 해두는 게 차라리 편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그녀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별궁에 갇힌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밖에는 늘 감시하는 눈이 있었고, 창밖에는 늘 지키는 발이 있었다. 유서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 안을 서성이며 생각을 곱씹는 것뿐이었다. 답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 한소아가 몰래 가져다준 낡은 지도 한 장이 시작이었다. 유서윤의 가문, 유씨 가문의 옛 영지에 그려진 지도였는데, 지도 한쪽 구석에 작게 표시된 표식이 있었다. "이게 뭐야." 유서윤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지도는 낡아서 손끝만 대도 부서질 것 같았다. 종이 가장자리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접힌 자국마다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우리 집 서고에서 찾았어." 한소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낡은 지도들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유씨 가문 문양이 찍혀 있길래 가져왔지." "들키면 어쩌려고." 유서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들켰으니까 걱정 마." 한소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말로 별걱정 다 한다는 표정이었다. 표식은 별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숲 속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특별한 표시는 아니었다. 그저 작은 점 하나와 그 옆에 흐릿하게 적힌 글자 몇 개뿐이었는데, 세월에 지워져 알아볼 수 없었다. "뭐라고 적힌 건지 알아볼 수 있어?" 유서윤이 물었다. "모르지. 그래서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거야." 한소아가 대답했다. '직접 가라고.' 유서윤은 속으로 되뇌었다. 별궁에 갇힌 몸으로 어떻게 그곳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밤, 유서윤은 시녀의 눈을 피해 별궁을 빠져나왔다. 처음으로 직접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문을 나설 때 심장이 어찌나 뛰던지, 손끝까지 떨렸다. 혹시라도 발소리가 크게 들릴까 봐 신발을 벗어 손에 쥐고 맨발로 복도를 지났다. *** 숲은 어두웠고, 나뭇가지가 얼굴을 긋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유서윤의 발걸음은 빨랐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누군가 뒤따라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그때마다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유서윤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걸음을 옮겼다. 지도가 가리킨 자리에는 낡은 건물 하나가 덤불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오래전에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별채였다. 지붕 일부는 무너져 내렸고, 담벼락에는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사람이 산 흔적은 오래전에 지워진 듯했다. "여기가." 유서윤은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먼지 냄새가 확 풍겼다. 코끝이 매울 정도였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낡은 책장, 부서진 의자, 그리고 벽면 가득한 서류함이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유일한 조명이었는데, 그마저도 흐릿해서 물건의 형체만 겨우 구별할 수 있었다. 서류함 하나를 열어보니, 오래된 문서 뭉치가 가득했다. 그 위에는 익숙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유씨 가문의 인장이었다. '이걸 누가 남긴 거지.' 유서윤은 문서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종이는 손을 대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 얇았고, 잉크는 오래되어 흑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용은 대부분 알아볼 수 없었다. 몇몇 장은 물에 젖은 흔적으로 글자가 뭉개져 있었고, 몇몇 장은 아예 뜯겨 나가 있었다. 그러던 중, 책장 맨 아래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는 자물쇠 없이 그냥 나무판을 덧대어 놓은 형태였다. 유서윤은 조심스럽게 뚜껑을 들어 올렸다. 상자를 열자, 낡은 일기장 한 권이 나왔다. 표지는 색이 바랠 대로 바래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첫 장을 펼치자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별채를 찾은 자에게.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유서윤의 손이 떨렸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누구야.' 그녀는 다급하게 다음 장을 넘겼다. 손끝이 종이를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하지만 그 뒤로는 낡은 종이가 붙어 있거나 글씨가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몇 장은 아예 검게 그을려 있어서, 누군가 일부러 태우려 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이걸 다 지워놓은 거야.' 유서윤은 초조하게 다음 장, 그다음 장을 넘겼다. 손이 점점 빨라졌다. 다만 마지막 문장 하나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네가 살아남고 싶다면, 아무도 믿지 마라." 유서윤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눈으로 따라가며, 혹시라도 다른 뜻이 숨어 있지 않은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문장은 그저 그 한 줄뿐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이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말라니.' 그녀는 일기장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 '그럼 한소아도 믿지 말라는 거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일기장을 남긴 사람이 누구인지, 왜 이런 경고를 남겼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보아온 예지의 조각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유서윤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숨이 멈춘 것 같았다. 손에 쥔 일기장을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발뒤꿈치가 부서진 의자 다리에 걸려 휘청였지만, 넘어질 새도 없었다. 어둠 속의 형체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