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법소녀님, 존엄만 돌려주세요

5화

정확히 뭐가 잘못됐는지는, 그 다음 순간 명확해졌다. 검은 로브 같은 옷이 몸을 감싸고 있었고, 등 뒤로는 처음 보는 길이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치는데, 그 감촉조차 낯설었다. 목소리도, 몸의 균형감도, 심지어 서 있는 자세마저 낯설었다. 무게 중심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다리를 벌리는 각도부터 뭔가 이상했다. ..나 지금 여자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인지한 다음에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받아들이는 데.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려다 멈췄다. 지금 이 상황에 얼굴 확인할 정신이 어디 있어. 그런데도 손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도 본능은 쓸데없는 데서 작동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남성으로서의 존엄, 대가로 잘 받아 갔다.』 흑월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낄낄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신났는지, 이 상황에서 웃을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게 새삼 어이없었다. "...이게 그 대가였어?!" 나는 소리치듯 되물었다. 목소리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 낮고 익숙했던 내 원래 목소리 대신, 처음 듣는 톤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도 처음이라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계약서 세부조항까지 읊어줄 시간은 없었잖아. 네가 급했지.』 ..그건 맞는 말인데,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세상에 존엄을 대가로 걸 때는 최소한 뭘 잃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자동차 살 때도 계약서 꼼꼼히 읽으라고 하는데, 목숨 걸고 하는 계약을 이렇게 대충 넘어갔다는 게 말이 되나. 따지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흑아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거대한 형체가 꿈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이 형체 불명의 상황을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반장님, 괜찮으세요?" 낯선 목소리로 물었다. 반장님은 여전히 나를 못 알아본 표정이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면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당연했다. 몇 초 전까지 자기 옆에 있던 신입 대원이,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로 바뀌어 있으니까. 나였어도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다. 아니, 나였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서준이냐?" 반장님이 조심스레 물었다. 목소리에 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네, 저예요." 대답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실제로 웃을 상황은 전혀 아니었지만. 어이없음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흑아가 다시 달려들었다. 쿠구구궁-! 발톱이 땅을 긁는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자, 이제 힘을 좀 써봐.』 흑월서가 재촉했다. "어떻게 쓰는데?!" 『물건 담아. 그게 네가 받은 능력이야.』 "...뭐?" 『물건 보관용 영혼마법. 뭐든 담을 수 있어. 무기든, 쓰레기든.』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지금 눈앞에서 흑아라는 거대한 위협이 달려오고 있는데, 내가 받은 능력이 물건을 담는 마법이라고? ..이게 무슨 사기야. 선특 멤버들은 화염이나 얼음, 빛의 검을 다루는데, 나는 물건을 담는다니. 이건 마법소녀치고 너무 소박한 능력 아닌가. 야구로 치면 다들 150km 강속구를 던지는데 나만 배트보이로 배정받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배트를 나르는 게 아니라 배트를 어딘가에 정리해서 넣는 배트보이. 『불만 있어?』 "있지! 완전 있지!" 『계약은 계약이야. 반품 안 돼.』 하지만 지금 따질 시간이 없었다. 흑아의 팔이 다시 채찍처럼 늘어나며 날아왔다.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손을 뻗자 손끝에서 검은 문양이 펼쳐졌고, 그 문양이 원형으로 확장되며 공간을 만들어냈다. 손끝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빨리, 뭐든 던져 넣어!』 뭘 던지라는 건지도 모른 채, 옆에 있던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을 그 원형 공간에 밀어넣었다. 펑-! 콘크리트 조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흑아의 채찍이 그 자리를 그대로 통과해서 허공을 갈랐다. 원래 콘크리트가 있던 자리에 발이 걸려서 흑아의 균형이 살짝 무너진 덕분이었다. ..잔재주로 겨우 버텼다. 대단한 전략이 아니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걸로는 오래 못 버틸 게 뻔했다. 흑아는 곧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달려들 게 분명했고, 나한테는 이 소박한 보관 마법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기도 없고, 방어막도 없고, 그냥 물건 넣는 주머니 하나. 이게 무슨 전투 능력이야, 이건 이삿짐센터 자격증이지. 반장님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 애썼다. 상처가 심해서 제대로 서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팔을 짚고 일어서려다 다시 무릎이 꺾였다. "서준아, 뒤로 물러나. 지금 너 그 몸으로는—" "안 돼요." 나는 반장님의 말을 잘랐다. "지금 물러나면 반장님도 형도 다 위험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능력도 부족하고, 몸도 낯설고, 상황은 최악인데, 그런데도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반장님이 다치고 형이 쓰러진 상태에서, 나 혼자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저 뒤편에 쓰러진 형의 모습이 시야 끝에 걸렸다. 숨은 쉬고 있는지, 움직임이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 사실이 오히려 다리에 힘을 실어줬다. 흑아가 다시 자세를 잡고 이쪽을 노려봤다. 그 새까만 눈구멍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눈구멍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눈동자도 없고 그냥 뻥 뚫린 어둠이었으니까. 그 어둠이 나를 조준하고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재밌게 됐네.』 흑월서가 낄낄거렸다. 『네 힘으로는 저 녀석 상대 못 해. 그거 알지?』 "알아, 안다고!" 나는 소리쳤다. "그러니까 뭐라도 좀 도와줘!" 『계약에 그런 조항 없는데.』 "그럼 뭐, 도와줄 마음도 없이 계약서에는 서명하라고 부추긴 거야?" 『그건 네가 급했던 거고.』 ..뭐야, 그럼 나 진짜 이대로 죽어야 하는 거야? 억울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존엄을 대가로 받은 힘이 이렇게 부족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마법소녀가 됐으면 뭐라도 화려한 걸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건 보관 마법이라니, 이건 전투 능력이 아니라 이삿짐센터 능력이었다. 티브이에서 봤던 마법소녀들은 다 지팡이 하나로 빛의 폭풍을 일으키던데, 나는 지팡이도 없이 손끝에서 이삿짐 창고 하나 여는 게 최선이었다. 흑아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했다. 쾅-! 발톱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 안쪽까지 차가운 공기가 밀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손끝에 남은 마력을 전부 끌어모았다. 이번엔 뭘 담을지도 모른 채, 그냥 손을 뻗었다. 검은 문양이 다시 펼쳐졌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이, 흑아의 발톱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발톱 끝에서 검은 액체 같은 게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아서 이 냄새를 기억하게 될지, 그럴 기회조차 없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방어선 저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저기 좀 봐! 마법소녀 나타났어!" 시민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커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든 손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것도 보였다. 이 상황에서 촬영 각도까지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 최악의 몸으로, 이 최악의 순간에, 데뷔라니. 흑아의 발톱이 코앞까지 다가온 채로,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