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다시 느껴진 건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뜨윽-, 하는 그 순간의 감각이, 자꾸만 재생됐다. 눈을 감아도, 세수를 해도, 심지어 이를 닦는 와중에도 그 서늘한 이물감이 손끝에서 살아났다.
..신경 쓰지 말자.
몇 번이나 스스로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자기 세뇌를 걸어야 겨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좀 서글프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밤에 결국 보고는 안 했다. 강도현 형한테도 별일 아니라고 우겼고, 형은 "그럼 됐지"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그게 좀 얄미웠다. 나는 하루 종일 그 감각을 곱씹었는데, 형은 내 말 한마디에 그냥 믿어버리다니. 신뢰받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늘 아침 조회 때도 그냥 일반 순찰 로그만 제출했다. 손이 살짝 떨렸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게 맞는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평화로울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조회실에는 윤하늘 누나가 태블릿을 손에 들고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누나는 항상 이런 순간에 제일 프로다워 보인다.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고, 목소리도 또박또박했다.
"오늘은 4구역 정기 결계 점검이랑, 어제 접수된 소형 마력 누출 재확인 하나 있고요. 큰 건 없어요."
"좋네." 고웅재 반장님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날이 최고지."
..반장님도 저랑 같은 생각이시네요.
반장님도 나름 평범을 좋아하시는구나 싶어서 괜히 동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곰 같은 남자가 평범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와 좀 달랐다. 조용해야 마법소녀 방송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다. 나는 목숨 걱정, 반장님은 시청률 걱정.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이렇게 다른 의미일 수가 있나.
"참, 오늘 저녁에 선특 정기 방송 있는 거 알지? 다홍 인터뷰 나온대." 반장님이 신나서 말했다.
"또요?" 강도현 형이 코웃음을 쳤다. "백서리는 인터뷰 잘 안 나오는데."
"까칠해서 그래. 근데 그게 매력이지." 반장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청아 언니는 원래 방송 잘 안 챙겨봐도 다 좋아요." 윤하늘 누나가 끼어들었다. "목소리 톤이 그냥 힐링이야."
"난 다홍이 최고인데. 밝고 씩씩하고." 반장님이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반장님은 딱 아저씨 취향이시네요." 강도현 형이 웃으며 놀렸다.
"넌 뭐 다른 줄 아냐. 백서리 얘기할 때 눈빛부터 달라지던데."
"그건 팬심이랑 다른 거예요, 반장님."
다들 자기 취향에 대한 확신이 넘쳤다. 이 팀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도 이렇게 태평할까 싶을 정도로 마법소녀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냥 커피를 마시며 흘려들었다. 이런 대화에 낄 자신도 없고, 끼고 싶지도 않았다.
오전 일정은 평소처럼 지루하게 흘러갔다. 4구역으로 이동하는 내내 강도현 형이 운전을 하며 라디오를 틀었다. 뭔가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정작 4구역에 도착해서는 결계 상태를 하나하나 점검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결계는 이상 없었다. 마력 수치도 정상 범위였고, 균열도 없었다.
소형 마력 누출 지점도 확인해보니 이미 자연 소멸된 상태였다. 반장님이 로그를 확인하며 "역시 별거 없네" 하고 웃었다.
다행이었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는 근처 김밥집에서 라면까지 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갈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이런 확신이 제일 위험한 거였는데.
그런데 오후 두 시쯤, 사무실 전체 스피커에서 경보음이 터졌다.
삐이이이잉-!
[마법관리청 긴급속보. 서울 강남권역 마재 등급 레벨 5 경보 발령. 발생 좌표 강남 3-7 지구. 원인 미확인. 확산 속도 비정상. 관할 특수기동지원대 전 대원 즉시 출동 지시. 이하 상세 지침 하달함.]
사무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라면을 먹으며 나눴던 실없는 농담도, 마법소녀 취향 논쟁도, 전부 순식간에 증발했다.
레벨 5.
레벨 5라는 소리를 실제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훈련소에서 배운 등급표에 따르면 레벨 5는 국가 최고 대응 등급이었다. 마법소녀 팀 전원 출동, 특수기동지원대 전 병력 지원, 군 병력 대기까지 걸리는 수준. 교과서에서만 보던 등급이 실제로 발령됐다는 게, 머릿속에서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냐." 강도현 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늘 여유 있던 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저 형도 저런 얼굴을 할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낯선 모습이었다.
고웅재 반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까지 다홍 얘기로 신났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곰 같은 몸집이 순식간에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전원 장비 착용, 5분 뒤 출동한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윤하늘, 오퍼레이터 채널 확보해. 강도현, 장갑차 시동 걸어놔. 서준이는—"
반장님이 나를 봤다. 잠깐 망설이는 눈치였다.
"너는 후방 지원 대기다. 최전선에는 안 나간다."
..그거 아닌데요.
순간 억울함이 확 올라왔다. 신입이라서 위험한 곳엔 못 나간다는 배려인 건 알겠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뒤로 밀려나는 게 유쾌하진 않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내 신조랑은 별개로,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팀이 위험한데 나만 뒤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억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반장님, 저도—"
"안 돼." 반장님이 딱 잘라 말했다. "규정이야."
..규정이라니까 더 할 말이 없네요.
반박할 시간도 없었다. 반장님은 벌써 다음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사무실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비를 챙기는 손이 떨렸다. 방검복, 마력 차단 건틀릿, 비상용 결계석. 하나씩 걸치는 동안 심장이 점점 빨리 뛰었다. 방검복 지퍼를 올리는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윤하늘 누나가 헤드셋을 쓰며 나를 힐끗 봤다.
"서준아, 표정이 왜 그래."
"아뇨, 그냥..." 말을 흐렸다. 어제 느꼈던 그 서늘한 감각이 다시 떠오른 건 그때였다.
뜨윽-.
같은 감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훨씬 강했다. 손끝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방향이 느껴졌다.
강남 3-7 지구.
경보가 발령된 그 좌표에서, 어제 느꼈던 그 이물감이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어제 그거잖아.
어제 무시했던 게 오늘 이렇게 커져서 돌아온 거였다. 보고할까 말까 고민했던 그 순간이 갑자기 후회로 바뀌었다. 그때 그냥 반장님한테 말했으면 어땠을까. 아니, 말했어도 뭘 어떻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출동한다!" 반장님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장갑차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했다. 나는 후방 지원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가 점점 낯설어졌다. 평소엔 그냥 회색 건물들이었던 풍경이, 오늘은 어딘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신호등도, 가로수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몇 번을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상황은 이미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후방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뒤에 남았지만, 이 서늘한 감각은 후방이든 최전선이든 상관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강남 3-7 지구가 가까워질수록, 그 서늘한 기운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손끝의 감각이 점점 예민해지면서, 심장이 그 리듬에 맞춰 뛰는 것 같았다.
장갑차 창문 밖으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밑에서 무언가가, 거대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