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반장님, 뒤로!"
내가 소리쳤지만 반장님은 강도현 형을 감싸느라 물러날 틈이 없었다. 형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서 미약하게 숨만 쉬고 있었고, 반장님은 그 위에 방패처럼 몸을 덮은 채였다.
..지금 저게 정상적인 판단인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라도 저 상황이었으면 똑같이 했을 것 같아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흑아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검은 깃털 같은 게 채찍처럼 늘어나며 반장님을 향해 날아왔다. 그 속도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빨라진 것 같았다. 아니, 빨라진 게 아니라 원래 이 속도였는데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못 본 거였을 수도 있고.
뜨어어억-!
반장님이 겨우 결계 방패로 막았지만, 충격에 뒤로 크게 밀려났다. 등이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에 세게 부딪혔다. 그 소리가 여기까지 울렸다. 뼈가 아니라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였는데도, 내 몸이 먼저 움찔했다.
"윤하늘, 지원은!" 반장님이 고통을 참으며 소리쳤다.
"오고 있습니다! 삼 분만 더!"
삼 분.
그 삼 분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지 아무도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삼 분이면 라면 하나 익는 시간이고, 삼 분이면 광고 두 개 보는 시간이고, 삼 분이면 -
..지금 이런 걸 왜 계산하고 있어.
머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뇌가 처리하기엔 너무 과부하라서 그런 건지.
흑아가 다시 몸을 일으켜 반장님 쪽으로 다가갔다. 느릿느릿, 그런데 그 느림 안에 확신이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느림. 반장님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저 큰 몸이, 저렇게 버티기만 하던 몸이 이렇게 무력해 보인 적이 있었나.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뭘 해야 하지. 무기도 없고, 전투 훈련도 제대로 못 받았고, 마력 감응력만 좋은 신입 대원이 저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대원 훈련 받을 때 배운 게 뭐였더라. 결계 치는 법? 그것도 제대로 못 하는데. 근접전? 그건 배운 적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그냥 관중이었다. 눈 뜨고 사람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관중.
그런데 몸이 먼저 앞으로 뛰어나갔다.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이게 무슨 심리일까. 뇌는 안 된다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다리는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나도 내 몸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재밌군.』
낮고, 오래되고,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였다. 어제부터 느껴진 그 서늘한 이물감이, 이제는 명확한 존재감으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었던 것처럼, 아주 익숙하게, 아주 뻔뻔하게.
"...누구야?" 뛰면서도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나는 흑월서. 삼그믐달의 신, 저주받은 책의 화신. 네놈이 어제부터 자꾸 나를 느끼고도 못 느낀 척하던 그 자식이지.』
말투가 예의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신이라면 좀 근엄하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계속 뛰며 소리쳤다. 앞에서 흑아가 반장님을 향해 다시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 팔이 다시 저 채찍처럼 늘어나면, 그때는 정말 막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중요하지. 네가 지금 저 곰탱이를 살리고 싶다면, 나랑 계약해야 해.』
"계약?"
반장님을 곰탱이라고 부르는 저 무례함에 잠깐 정신이 팔릴 뻔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도.
『생존 계약. 대가는 하나야. 네놈의 남성으로서의 존엄. 그거 하나만 내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남성으로서의 존엄이라니,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존엄이 뭔데. 자존심 얘기하는 거야? 아니면 뭔가 더 물리적인 걸 말하는 거야?
..지금 이걸 물어볼 시간이 있나.
없었다. 그런데 흑월서는 설명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치 이게 당연히 협상 테이블에 올릴 만한 조건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대가를 던져놓고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할 시간 없어. 곰탱이 죽는다.』
앞을 보니 흑아의 팔이 정말로 반장님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반장님은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늦었다. 손끝이 부르르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마력을 짜내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몸을 일으키려는 힘조차 없어서 떨리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 나는 순간적으로 계산했다. 계산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거의 반사 같은 판단이었다. 계약의 대가가 뭔지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이걸 거부하면 반장님이 죽는다. 그리고 형도 이미 쓰러져 있다. 여기서 내가 뭘 따지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을 왜 안 줘요.
억울했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이렇게 몇 초 안에 내려야 한다는 게. 누구는 계약서 읽는 데도 삼 일씩 걸리고 도장 찍기 전에 변호사한테 자문받고 그러는데, 나는 지금 달리면서 신 하나랑 구두계약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는 건 사실이었고, 시간이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해. 그냥 해!" 내가 외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무서워서 그런 건지, 뛰느라 숨이 차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선택이야, 물론 후회할 수도 있고.』
흑월서의 목소리가 웃음기를 띤 채로 대답했다. 저 웃음기가 왜 이렇게 불안하게 들리는지.
『계약, 성립.』
그 순간 내 몸을 관통하는 감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느껴본 어떤 통증과도 달랐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뭔가가 통째로 빠져나가는 느낌. 마치 몸속에 있던 뼈대 하나가 그냥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은, 이상하게 허전하면서도 아픈 감각.
그리고 동시에, 뭔가가 그 빈자리로 밀려들어왔다.
몸이 갑자기 가벼워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완전히 낯설어졌다. 옷이 갑자기 헐렁해진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어딘가 꽉 조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모순된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지금 내 몸이 그걸 하고 있었다.
손끝의 감각이 달랐다. 옷의 촉감이 달랐다. 심지어 시야의 높이마저 미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세상이 조금 더 낮아진 것 같은, 아니면 내가 조금 작아진 것 같은.
..이게 뭐야.
생각할 틈도 없이 흑아의 팔이 반장님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라, 몸이 나를 이끄는 느낌이었다. 마치 운전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고 나는 조수석에서 구경만 하는 것 같은, 그런데도 이게 분명히 내 몸이라는 이상한 확신.
반장님 앞으로 뛰어들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끝에서, 뭔가 낯선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내가 다뤄본 마력이랑은 질감 자체가 달랐다. 더 무겁고, 더 오래된, 뭔가 바닥에 깔린 먹물 같은 느낌.
휘익-!
검은 안개 같은 게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흑아의 팔을 밀어냈다.
흑아가 짧게 뒤로 튕겨 나갔다. 그 큰 덩치가 그렇게 쉽게 밀려나는 걸 보면서, 나조차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실감이 안 났다.
반장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누구...?"
반장님의 그 질문이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 목소리도, 내 손도, 내가 알던 그것들이 아니었으니까. 반장님 눈에 비친 나는 지금 원래의 내가 아닌 뭔가로 보이는 게 분명했다.
숨을 몰아쉬는 사이, 시야 끝에 비친 내 손을 봤다.
작고, 하얗고, 낯선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도, 손톱 모양도, 심지어 손등의 뼈가 도드라진 위치도 내가 알던 내 손이랑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낀 것 같은, 그런데 그 손이 내 신경에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그 기묘한 감각.
..이거 진짜 내 손이야?
몇 번을 다시 봐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확신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확신은, 내가 반장님의 얼굴에서 놀람을 넘어선 다른 표정—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당황과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을 발견했을 때 더 짙어졌다. 반장님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나였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 반장님, 저 지금 뭘로 보이는 거예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흑아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릉-.
땅을 긁는 소리였다. 방금 밀려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그 붉은 눈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 몸으로 저걸 또 막으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눈앞의 위협을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