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지하 전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지하 전체.
서울의 지하 전체.
축축한 돌바닥 냄새가 코끝에 감겼다. 야광 이끼가 은은하게 뿜어내는 초록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그 눈, 세로로 길게 갈라진 동공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데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제 감각으로는 최소 2호선 전 구간, 그리고 다른 노선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울렸다. 동굴 벽을 타고 되돌아오는 것처럼.
"…아니, 그럼 나 하나가 그걸 관리해야 된다는 거예요?"
"당신은 던전마스터입니다."
말이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화가 났다.
분명 사람 말로 대답했는데, 사람 말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던전마스터, 던전마스터 하는데. 저 그거 게임에서 몇 번 들어본 단어예요. 근데 그게 지금 제 인생에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저 그냥 대학생이에요. 학점도 3점대고, 연애도 못 하고, 알바 시급도 최저임금인 그런 사람이라고요. 이런 거 감당 못 해요."
말하다가 스스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나오는지.
하지만 한번 터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뭘 특별히 잘한 것도 없어요. 그냥 지하철 타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시험 기간이라서 도서관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그냥 그거뿐이었다고요. 근데 갑자기 이런 거 짊어지라고 하면, 저는……."
목소리가 끊겼다.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울면 지는 것 같았다.
뭐에 지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안쪽이 뻐근했다. 마치 누군가 손을 넣어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 뚝 끊겼다.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동굴 천장에 매달린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초록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흔들리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새롭게 떠올랐다.
이전과는 다른 색이었다.
금빛에 가까운 창.
[던전마스터의 심리 상태가 조건에 도달했습니다.]
[숨겨진 조건 - '결핍된 소망'이 감지되었습니다.]
[질문: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뭔 뜬금없는 질문이냐 싶었는데, 손이 저절로 창에 닿았다.
"이거 눌러도 되는 거예요?"
물었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손끝이 창의 표면에 닿아 있었다.
닿는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빛이 안개처럼 번지더니 모든 것이 하얗게 지워졌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평범한 강의실, 평범한 오후, 창밖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
맴맴.
선풍기가 천장에서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 누군가의 하품 소리, 볼펜 딸깍이는 소리까지 전부 익숙했다.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강도윤."
"네."
대답하고 나니, 옆자리 친구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어제 술 많이 마셨냐, 얼굴이 왜 그래."
"몰라, 잠을 못 잤나 봐."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마치 원래 하려던 말이 있었던 것처럼.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놓인 전공 서적, 손목에 찬 낡은 시계, 필기해둔 노트 귀퉁이의 낙서까지. 전부 내 것이었다. 진짜로 내가 살았던, 아니 살아가던 세계였다.
장면이 바뀌었다.
집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신발 정리대 위에 놓인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우산, 손잡이가 살짝 휘어진.
엄마가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도윤아 밥 먹어."
평범한 목소리, 평범한 반찬 냄새.
된장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옆에 계란말이가 노랗게 부쳐져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내 앞에 앉아 물었다.
"오늘 학교 어땠어."
"그냥, 똑같았어."
"똑같은 게 좋은 거야."
엄마가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데 가슴이 죄이듯 아팠다.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였나.
특별하지 않은 것.
남들과 다르지 않은 것.
인정받을 필요 없이, 그냥 존재해도 괜찮은 것.
"엄마."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말할 수 없었다. 여기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말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사라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장면이 다시 흔들렸다.
모래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강의실도, 밥상도, 엄마의 웃음도 알알이 흩어져 바람에 날아갔다.
숟가락을 쥔 손끝부터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 새어 나갔다.
"엄마."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
눈을 떴을 때, 다시 던전이었다.
차가운 돌바닥, 야광 이끼,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용의 눈.
"괜찮습니까."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네."
대답하는데 목이 메었다.
방금 본 게 진짜 내 마음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특별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평범함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나왔던 건지 아니었던 건지도 헷갈렸다.
"뭘 보신 겁니까."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 몸집에 비해 목소리는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그냥, 예전 생각이요."
더 자세히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또 무너질 것 같았다.
시스템창이 다시 떠올랐다.
[결핍이 확인되었습니다.]
[보상: 히든 스킬 '경계의 눈'이 지급됩니다.]
[숙련도 조건 없이 즉시 사용 가능합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원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뭔가가 강제로 나에게 얹혀졌다.
평범함을 잃은 대가로 능력을 받는다니, 이게 무슨 거래인지 모르겠다.
"경계의 눈이 뭐예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멈췄다.
표정이 다시 굳어 있었다.
콧구멍이 살짝 벌어졌다. 뭔가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처럼.
"밖에서, 뭔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뭐가요."
"인간입니다. 여러 명. 무장하고 있습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이 안에, 밖에서 뭔가가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
"무장이라니, 어떤 식으로요? 경찰이에요? 아니면……."
"모르겠습니다. 발소리와 쇠붙이 소리로만 판단했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눈물이 고여 있던 눈이 순식간에 말랐다.
"몇 명이나요."
"셋, 아니 넷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몸이 미세하게 긴장하는 게 보였다. 비늘 사이사이로 근육이 조금씩 팽창하는 느낌이었다.
스킬 창이 여전히 눈앞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경계의 눈 - 사용하시겠습니까?]
손끝이 저절로 창을 향했다.
다각.
돌바닥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