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주인님, 재앙이 될게요

4화

웅, 하는 진동은 밤새 그치지 않았다. 밤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야광 이끼의 빛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걸 보고 나는 그게 밤이라고 결론 내렸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믿을 게 없으면 아무거나 붙잡고 믿어야 하니까. 잠을 자야 하나 고민하다가,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배는 참 눈치가 없다. 용이 옆에 있고, 던전이 지하 전체로 퍼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배는 정직하게 꼬르륵거렸다. 시스템창을 불러 인벤토리라는 항목을 눌러봤다. 손끝이 허공을 스치자 파란 창이 뜨고, 그 안에 물병과 육포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심지어 개수도 넉넉했다. "이건 또 언제 생긴 거예요." "던전마스터의 기본 지급품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좀 말해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이 던전에 굶어 죽는 엔딩은 없다는 뜻이니까. 그녀는 대답 없이 육포 하나를 뜯어 나에게 건넸다. 포장지를 뜯는 손놀림이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용이 육포 포장을 뜯는 모습, 그거 좀 웃겼는데 웃을 상황이 아니라서 참았다. 손끝이 스쳤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용은 냉혈동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당신 몸, 따뜻하네요." "…그런가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잠깐 내려다봤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다는 표정.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펴보기도 했다. 자기 몸에 대해서 자기가 모른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것도 지금은 이상함 목록의 한 줄에 끼워 넣는 걸로 정리했다. 뭔가 이상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캐물을 힘도 없었다. 육포는 짜고 질겼다. 씹을수록 육수 비슷한 맛이 배어 나왔는데, 그게 또 묘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사람은 살아있으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뭐라도 씹는다. 그 사실이 어쩐지 위로가 됐다. 육포를 씹으면서 나는 문 너머의 진동에 대해 물었다. "저거, 뭔지 알아요?" "모릅니다." "세 번째네요, 모른다는 대답." 세어봤다는 게 스스로도 좀 웃겼다. 불안할 때 사람은 이상한 걸 센다. "모른다"는 대답의 횟수 같은 거. "저는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그 말이 솔직하게 들렸다.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쉽게, 아무 근거도 없이 믿어버리는 게 원래의 나였나. 아니었다. 원래의 나는 택배 기사님이 문 앞에 물건을 두고 갔다는 말도 CCTV로 확인하는 인간이었다. 하루 전만 해도 나는 이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이 사람이 없으면 무서워서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그 변화의 속도가 스스로도 무서웠다. "근데 아까 그 말, 첫 번째 재앙이 되겠다는 거."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눈동자 안쪽에서 뭔가가 잠깐 일렁였다. 불빛의 반사인지, 원래 그런 눈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가진 힘을 아직 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큰데요." 그녀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손끝에 작은 불씨를 하나 만들었다. 엄지손톱만 한 불씨였다. 하지만 그 불씨의 온도는 몇 걸음 떨어진 나에게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뺨이 화끈거렸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잔상이 시야 한구석에 남았다. 이게 가장 작은 힘이라고 했다. 가장 작은 게 이 정도면, 큰 건 얼마나. "이게 제가 다룰 수 있는 가장 작은 힘입니다." "…가장 작은."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가장 큰 걸 보여드리면, 당신이 지금 있는 이 던전 전체가 사라질 겁니다." 말투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가 뒤늦게 나를 눌렀다. 나는 육포를 씹던 걸 멈췄다. 입안에 남은 조각을 삼키는 것도 잊었다. "그래서 재앙이라고 한 거예요." "네. 저는 힘을 조절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완전히 풀려난다면, 당신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당신을 지운 채로 적을 없앨지도 모릅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켜주겠다는 존재가 동시에 나를 지울 수도 있다는 존재라는 사실. 그 이중성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그 손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따뜻한 손이 나를 태울 수도 있는 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면 그 힘 쓰지 마세요." "당신이 위험에 처한다면 쓸 겁니다." "제가 위험에 안 처하게 조심하면 돼요?" 말해놓고도 스스로 한심했다. 위험한 지하 던전 한복판에서 조심하면 된다니. 그건 물에 빠진 사람한테 숨 참으면 된다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처음으로 감정이 스쳤다. 연민인지, 걱정인지, 다른 무엇인지. 나는 그 표정을 읽으려고 애썼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주는 이미 위험한 곳에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육포 봉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내려놨다. 입맛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그날 밤, 나는 그녀의 옆에 등을 대고 잠을 청했다. 바닥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등에서 새어 나오는 온기가 그 냉기를 조금 밀어냈다. 이끼 빛이 완전히 꺼지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두근, 두근. 생각보다 느리고, 생각보다 커다란 심장 소리였다. 마치 큰 종이 멀리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용도 심장이 있구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그 순간엔 새삼스러웠다. 심장이 있다는 건, 멈출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소름이 돋았다. 왜 하필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눈을 감고 그 리듬에 맞춰 숨을 쉬어보려 했다. 두근에 맞춰 들이쉬고, 두근에 맞춰 내쉬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까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잠이 슬며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심장 소리에 맞춰, 어디선가 또 다른 진동이 울렸다. 쿵. 처음엔 심장 소리의 일부인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박자가 어긋났다. 심장은 두근, 두근인데 그건 쿵, 하고 한 번 울리고 끊겼다. 이번엔 문 너머가 아니었다. 훨씬 깊은 곳, 던전의 아래쪽 어딘가에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바닥을 통해 등뼈까지 전해지는 진동. 마치 지하 전체가 거대한 심장이고, 그 심장이 방금 한 번 뛴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표정보다도 낯설었다. 연민도 걱정도 아닌, 순수한 경계. "이건." "뭐예요, 왜 그래요." 목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렸다. "이 던전, 제가 생각한 규모가 아닙니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몸을 일으켜 문 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등이 팽팽하게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강남역 하나가 아닙니다. 이건, 지하 전체가 던전화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어둠 속에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심장 소리와, 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그 진동만이 번갈아 울렸다. 두근, 두근, 쿵. 두근, 두근, 쿵. 마치 이 지하 전체가 나를 향해 박자를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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