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주인님, 재앙이 될게요

3화

돌바닥에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시렸다. 차가움이 먼저 왔고, 그다음에 딱딱함이 왔다. 청바지 한 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온도였다. 지하철 좌석이 그리웠다. 히터 바람 나오는 그 좁고 답답한 자리가, 이제 와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내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용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는 각도로, 미동도 없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정지 화면 같았다. 호칭을 정하지 못해서 나는 그녀를 계속 '저기요'라고 불렀고, 그녀는 나를 계속 '주'라고 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름 없는 관계였다. 생각해보면 좀 웃긴 일이었다.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던전 안에서, 나는 명함도 없는 존재한테 '저기요'를 시전하고 있었다. "나가는 방법 없나요." "제가 알기로는, 던전마스터가 정한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합니다." "그 조건이 뭔데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같은 대답이 두 번째로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른다는 말을 참 편하게 하시네요." 그녀는 그 말에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표정이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았다. 짜증이라도, 미안함이라도. 뭐라도. 근데 저건 그냥 벽이었다. 대답하는 벽.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던전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끼가 미끈거렸다. 축축하고, 차갑고, 살짝 미끄러웠다. 손바닥에 그 감촉이 그대로 남았다. 벽은 진짜였다. 차갑고, 딱딱하고, 진짜였다. 이게 게임이 아니라는 게, 손끝을 통해서 뒤늦게 실감이 났다. 로딩 화면도 없고, 튜토리얼 스킵 버튼도 없고, 리셋 버튼도 없다는 것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벽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었다. 십 분, 이십 분, 아니 시간 감각이 사라져서 몇 분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이 있었다면 시간을 봤을 텐데, 주머니에 손을 넣어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다 사라졌으니까. 그러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같은 돌기둥, 같은 균열, 같은 이끼. 심지어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의 온기까지 그대로였다. "…이거 뭐야."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맵 경계에 부딪혀서 되돌아온 기분. "닫힌 회랑입니다. 던전마스터가 아직 확장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구역만 존재합니다." "내가 승인을 하면 넓어져요?" "아마도요." 또 아마도. 이 사람, 아니 이 존재는 '아마도'와 '모릅니다'로 대화를 완성하는 스킬을 가진 게 분명했다. 나는 다시 시스템창을 불러봤다. 손짓만 했는데 창이 스르륵 떠올랐다. 생각보다 반응이 빨랐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던전 확장 - 승인하시겠습니까?] 망설임 없이 승인을 눌렀다. 어차피 여기서 더 나쁠 게 뭐가 있나 싶었다. 쿠구구. 바닥이 흔들리며 벽이 뒤로 밀려났다. 발밑의 돌이 미세하게 울렸다.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무릎까지 올라왔다. 좁았던 회랑이 서서히 넓어졌다. 돌기둥 몇 개가 새로 솟아났고, 천장에는 야광 이끼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그 빛이 파랗다기보다는 형광등이 꺼지기 직전의 색이었다. 깜빡, 깜빡.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불안한 점멸이었다. 넓어진 공간 끝에, 문이 하나 보였다. 돌로 만들어진, 지하철 스크린도어와는 전혀 다른 문. 표면에는 균열도 없고 이끼도 없었다. 마치 이 공간 전체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물건이었다. "저거다." 나는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다리가 이렇게 잘 움직인다는 게 오히려 낯설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과제만 하던 몸인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잡이는 없었지만 문에는 손바닥 모양의 흠집이 있었다. 사람 손보다 조금 작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 손 크기와 비슷했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마치 이 문이 애초에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바닥 전체로 퍼졌다. [출구 조건 미충족.] [던전 위협도가 기준 미달입니다.] [던전마스터는 최소 1차 클리어 조건을 완료해야 합니다.] "뭔 소리야, 위협도가 낮아서 못 나간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웃다가 그 웃음이 이상하게 뒤틀리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이렇게 얇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장난하나. 나가야 될 거 아니야. 나 오늘 과제 있었는데. 엄마한테 전화도 해야 되는데. 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막혔다. 손바닥으로 문을 두 번, 세 번 내려쳤다. 쿵쿵쿵. 문은 미동도 없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뼈가 울리는 감각이 팔목까지 전해졌다. "열어. 열어 이 씨." 소리가 커졌다.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목소리가 던전 벽에 부딪혀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마치 이 공간이 내 절규를 즐기는 것처럼.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화면 보며 서 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과제 마감이 세 시간 남았다고 짜증 내던 그 순간이 이제는 사치스러울 만큼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인 척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사치였다. 그냥 사치였다. 등 뒤에서 그녀가 조용히 다가왔다. 발소리가 없었다. 존재감만 서서히 짙어졌다. "주." "됐어요. 그냥 좀……." 말을 잇지 못했다.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져서 더 이상 문장을 만들 수가 없었다. 목구멍 안쪽이 뜨거웠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았다. 무릎을 굽히고, 나와 같은 눈높이로. 용의 눈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됐다가 다시 좁아졌다.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 거리에서는 숨결이 느껴졌을 텐데, 그녀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무無의 존재감이 위로가 됐다. "당신이 나가고 싶다는 걸 압니다." "그럼 좀 내보내주지." "저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저는 계약된 종속체일 뿐이니까요." 종속체.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종속체라는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그럼 뭘 할 수 있는데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용의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열렸다.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당신이 견디는 시간을 함께 견딜 수는 있습니다." 별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 챗봇도 이보다는 나은 대답을 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에 힘이 살짝 풀렸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뭔가가 바뀐 것 같았다. 바닥의 냉기가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을 나눠 가진 느낌이었달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1차 클리어 조건이라는 거, 그건 또 뭔데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또 그 대답이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문을 올려다봤다. 문 너머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웅. 뭔가 거대한 것이 그 너머에서 숨 쉬고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벽을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마치 던전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처럼, 아주 느리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이 던전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걸 직감했다. 작은 회랑 하나가 이 정도 반응을 만든다면, 저 문 뒤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문에 얹었던 손을 슬며시 떼었다. 손바닥에 남은 냉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문 너머의 진동이 한 박자 빨라졌다. 웅, 웅. 마치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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