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주인님, 재앙이 될게요

2화

붉은 눈이 천천히 다가왔다. 발소리는 없었다. 소리가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발소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벅저벅, 뭐 그런 거라도. 그럼 최소한 저게 물리법칙을 따르는 존재라는 확신은 들었을 텐데. 하지만 저건 그냥 공중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그것의 이동을 도와주는 것처럼.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발이 걸려 넘어졌다. 등이 돌기둥에 부딪혔다. 쾅. 아팠지만 아프다고 느낄 여유가 없었다.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보다, 눈앞에서 점점 커지는 붉은 점 두 개가 더 급했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 쉬는 법을 까먹은 것 같았다. 폐가 있다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냥 가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게 죽기 직전에 느끼는 감각인가. 영화에서 보면 죽기 직전엔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던데, 내 인생엔 파노라마로 볼 만한 게 있었나 잠깐 딴생각을 했다. 없었다. 그래서 더 서러웠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다시 떠올랐다. [적대 개체 접근 감지.] [던전마스터 보호를 위해 초회 소환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Y / N] Y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N을 누르면 뭐,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죽으세요" 같은 문구가 뜨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손끝으로 창을 찔렀다. 닿지 않았지만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삐빅. 빛이 폭발했다. 하얀 빛이 아니라 짙은 남색 빛, 마치 심해의 색깔 같은 빛이 내 앞에 원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그 빛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존재감만으로 공기를 밀어냈다. 귓속이 먹먹해질 정도로. 붉은 눈의 짐승이 멈춰 섰다. 그것도 이 빛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내게 다가오던 그 여유로운 움직임이, 지금은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마치 리모컨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빛 속에서 무언가 형태를 갖춰갔다. 처음엔 뿔이라고 생각했다. 사슴의 그것과 비슷한 곡선.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슴 뿔이 저렇게 빛을 반사할 리가 없는데. 그러나 자세히 보니 뿔이 아니었다. 비늘로 덮인 두 개의 각. 용의 것이었다. 뿔 아래로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 아래 얼굴이 드러났다.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오히려 인간보다 더 정갈하게 다듬어진 얼굴이었다. 콧대며 입술선이며, 어디 하나 대충 만들어진 부분이 없었다. 다만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었다. 뱀의 눈, 아니 용의 눈.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다. 하지만 서 있는 자세만으로 그 자리의 공기가 눌리는 게 느껴졌다. 등 뒤로는 접힌 날개의 윤곽이 옷 위로 도드라져 있었다. 검은 옷감 위로 접힌 날개뼈의 곡선이, 마치 옷 안에 뭔가를 숨긴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 안에서 불꽃 같은 게 일렁였다. 아니, 진짜 불꽃은 아니었다. 근데 그렇게 보였다. "…소환되었군." 낮은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치고는 낮았고, 그 낮음이 오히려 위압적이었다. 목소리에 무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말 한마디가 공기를 눌러 앉히는 것 같은 느낌. 그녀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붉은 눈의 짐승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짐승이 그대로 굳었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이 밀어내는 것처럼, 그것은 조용히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소리 없이.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짐승이 도망갔다. 그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눈빛 한 번으로 저게 가능한 건가. 현실에서 눈빛으로 사람 물러나게 하려면 최소 팀장급 이상은 돼야 할 것 같은데, 저건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저 정도구나.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당신이 나를 소환한 자인가." "…어, 네. 아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저기, 시스템에 그렇게 뜨긴 했는데."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마"라는 부사를 쓰는 인간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확신 있게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 갔다. 그녀는 잠시 나를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상품을 평가하는 눈으로. 그 시선이 얼굴을 지나 어깨를 거쳐 발끝까지 내려가는 동안, 나는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면접 자리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그러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主)를 뵙습니다." "네?"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방금 짐승 하나를 몰아낸 존재가 갑자기 예의를 차리니, 반응할 방법을 몰랐다. "계약에 따라, 저는 당신을 주로 섬깁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정중했다. 하지만 그 정중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방금 짐승 하나를 눈빛으로 몰아낸 존재가, 나 같은 평범한 대학생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게. 이건 마치 사자가 고양이 앞에서 절하는 것 같은 그림이었다. "저기, 일어나셔도 되는데." "주의 명이라면."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녀의 키는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의 세로 갈라짐이 더 선명했다. 무섭다기보다는, 낯설었다. 낯설다는 감정이 이렇게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피부는 인간의 것과 비슷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매끄러웠다. 비늘이 시작되는 경계가 목덜미쯤이었나.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실례일 것 같아서 시선을 돌렸다. "이름이 있나요?" "이름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주께서 지어주시면 됩니다." "…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 이름을 지어달라니. 반려동물도 아니고. 근데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하기엔 저 존재감이 너무 과했다.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여긴 어디예요? 이거 다 뭐예요? 저 왜 여기 있어요?" 질문이 세 개나 한 번에 튀어나왔다. 머릿속에 쌓여있던 궁금증이 한꺼번에 터진 거였다. 따지고 보면 세 개가 아니라 서른 개는 더 있었지만, 일단 세 개만 나왔다.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강남역이 던전으로 재구성됐습니다. 당신은 그 관리자로 선택됐습니다. 저는 초회 소환으로 당신에게 귀속된 존재입니다." 말투에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오늘 날씨를 설명하듯이. 강남역이 던전이 됐다는 게 저렇게 무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니까 그건 알겠는데, 왜 하필 나예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차라리 "당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라든가 뭐 그런 거짓말이라도 해줬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모른다는 대답이 제일 무서운 대답이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나를 바라봤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눈만 마주치는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던전 안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짐승들의 숨소리, 벽을 긁는 소리, 물이 떨어지는 소리.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이 겨우 돌아왔다. 아까부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는데, 저 물소리가 시간을 다시 돌려놓은 것 같았다. "주." 그녀가 나를 불렀다. "네." "저는 앞으로 이 던전의 첫 번째 재앙이 될 겁니다." "…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저 말을 제대로 들은 건가. 재앙이라니, 자기소개 치고는 좀 과격한 단어 아닌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요."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그 말이 품고 있는 온도가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재앙이라는 단어와, 당신을 지킨다는 말이 어떻게 같은 문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머릿속에서 그 두 단어가 계속 부딪혔다. 재앙, 그리고 보호.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재앙이 되겠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문장인가. 아니면 저건 그냥 저 존재만의 언어인 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그 눈동자 안에서, 뭔가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충성인지, 다른 무엇인지, 그 순간엔 구별할 수 없었다. 던전 안쪽 어둠에서 다시 낮게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도망갔던 그 짐승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눈동자만이 미묘하게 좁아졌을 뿐. "곧 더 올 겁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더요? 뭐가 더 와요?" "이곳은 이제 막 재구성됐을 뿐입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던전에는, 항상 시험하려는 것들이 몰려듭니다." 시험이라는 단어가 유독 걸렸다. 나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이 던전 자체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결과가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저기, 그럼 저는 뭘 해야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은." 그 말이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더 불안해졌다. "제가 있는 동안"이라는 조건문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럼 그녀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둠 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이번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날개의 윤곽이 옷 아래에서 꿈틀, 부풀었다. "주."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담담함 아래로 뭔가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당분간 제 뒤에 계셔주십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저편에서 붉은 눈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까와 같은 그 눈이 아니었다. 숫자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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