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풀숲 사이로 짐승의 등이 보였다.
거대한 몸집, 검붉은 털가죽, 그 밑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짐승은 은빛 머리카락의 그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이는 나무 밑동에 등을 붙인 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어.)
나는 손에 잡히는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차갑고 거친 표면이 손바닥에 그대로 박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다.
"이쪽이야!"
돌은 짐승의 옆구리에 맞고 튕겨 나갔다.
탁.
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등줄기가 얼어붙는 감각이 스쳤다.
(생각이 없었다.)
그런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짐승이 방향을 바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쿵쿵.
땅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발밑의 흙이 그 진동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도망칠 것인가, 맞설 것인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배낭을 뒤졌다.
지퍼가 잘 열리지 않아서 손끝이 헛돌았다.
등산할 때 챙긴 캠핑용 도끼가 손에 잡혔다.
(이런 걸로 될까.)
의심이 들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짐승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웠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짐승이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나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퍽.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두꺼운 나무 밑동이 통째로 부서졌다.
나뭇조각과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중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이 뒤늦게 느껴졌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그 생각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들었다.
손이 떨렸지만, 도끼를 놓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짐승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몸이 나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짐승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엔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도끼를 짐승의 앞발을 향해 휘둘렀다.
손목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어깨까지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도끼날은 두꺼운 가죽에 튕겨 나가듯 미끄러졌다.
짐승은 잠시 몸을 움찔했을 뿐, 오히려 더 사납게 포효했다.
크아아아.
숲 전체가 그 울음소리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해졌다.
나뭇잎들이 그 소리의 파동에 떨리듯 흔들렸다.
나는 뒤로 넘어졌다.
어깨가 나무뿌리에 부딪혔다.
둔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짐승의 앞발이 다시 위로 들렸다.
이번엔 정확히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 발톱 끝에서 흙과 나무껍질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끝인가.)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스쳤다.
5년간의 야근, 상사의 목소리, 그리고 이 시골집에서의 며칠간의 평온함까지.
그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허탈함이 먼저 밀려왔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때였다.
쐐애액.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보다도 더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짐승의 앞발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몸이 옆으로 밀려나듯 쓰러졌다.
쿠웅.
나무들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땅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자리를 바라봤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나를 노리던 그 거대한 존재가, 지금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짐승이 쓰러진 자리 위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다.
검은 로브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고, 그 자락이 바람도 없는 공기 속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검이었다.
칼날에서 옅은 푸른빛이 흐르고 있었다.
달빛도 아니고, 형광빛도 아닌, 처음 보는 색이었다.
그 빛이 검날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짐승은 완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거대한 몸이 그렇게 조용해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정적이 흘렀다.
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었다.
숲 전체가 그 순간만큼은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구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여전히 흙바닥을 짚고 있었지만, 그 감각조차 멀게 느껴졌다.
그 존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로브 자락이 다시 한번 소리 없이 흔들렸다.
얼굴은 로브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빛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낯설고 깊은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마치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등줄기가 다시 한번 서늘해졌다.
작은 존재, 은빛 머리카락의 그 아이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그 낯선 존재의 다리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두려움과 안도가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손이 로브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것만 확실했다.
그 존재가 낮은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어조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거울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는... 저기서 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 존재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로브의 그늘 속에서 그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아이와 함께 숲 안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로브 자락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이어졌다.
아이는 몇 번인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로브 자락이 나무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자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삼켜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벌레 울음소리가 서서히 되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갔고, 그 소리조차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바닥의 흙냄새와 짐승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에 뒤섞여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 속에는, 두려움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저 사람은 대체...)
나는 손에 쥔 도끼를 내려다봤다.
칼날 끝에는 짐승의 가죽에서 묻어 나온 피 한 방울이 말라붙어 있었다.
방금까지 죽음을 코앞에서 마주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숲 안쪽, 아이와 그 존재가 사라진 방향을 나는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다시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과는 다른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소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