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나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마당 끝, 감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도 딱히 할 일은 없지.)
그 생각이 오히려 좋았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서울에 있었다면 이 시간엔 이미 알람이 세 번쯤 울렸을 테고, 나는 그걸 다 무시하다가 결국 일곱 시 반쯤 허둥지둥 씻고 지하철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잠시 더 뒤척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었다.
퇴사한 지 반년이 지났다.
5년 동안 야근과 상사의 폭언에 시달리던 회사원이었다는 게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가상화폐로 얻은 돈은 내가 다시 일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었다.
전남 산골,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이 낡은 시골집이 지금 내 세계의 전부였다.
가끔은 이게 정말 내 삶인가 싶을 때가 있었다.
매달 스물몇 번째 되던 날 통장을 확인하며 한숨 쉬던 사람이, 지금은 흙 묻은 손으로 아침을 맞고 있다는 게.
아침을 먹고 나서 마당을 정리했다.
잡초를 뽑고 텃밭에 물을 주는 일이 요즘 내 유일한 노동이었다.
손끝에 흙이 묻는 감각이 이상하게 좋았다.
예전엔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굳어 있던 손이 이제는 흙과 나무를 만지고 있었다.
손톱 밑에 낀 흙을 씻어내다가도, 그게 더러운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해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텃밭의 상추는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자라 있었다.
고추 모종도 이제 제법 줄기가 단단해졌다.
나는 물뿌리개를 든 채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잎사귀에 남은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걸 지켜봤다.
바람이 한 번 불자 감나무 잎들이 부딪히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집을 살 때 헛간은 딸려 있던 부속 건물이었다.
이전 주인이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 그 안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이사 온 첫날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본 게 전부였다.
그때는 이상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낡은 나무 냄새와 캄캄한 어둠이 왠지 발을 붙잡았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곳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날이 맑아서인지, 아니면 마당 정리를 다 끝내고 나서 남는 시간이 어색해서인지는 몰랐다.
헛간 문을 밀자 삐걱, 낮은 소리가 났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햇빛이 문틈으로 스며들어와 바닥에 좁고 긴 빛줄기를 만들었다.
그 빛줄기의 끝에, 구석에 세워진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다가가지 않고, 잠시 헛간 안을 둘러봤다.
낡은 호미와 삽이 벽에 걸려 있었고, 나무로 짠 궤짝 몇 개가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마른 짚더미가 흩어져 있었고, 그 위로 거미줄이 얇게 늘어져 있었다.
공기는 눅눅했고,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구석의 그것만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전신 거울이었다.
나무로 짜인 프레임, 모서리마다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표면에는 얇은 이끼 같은 얼룩이 번져 있었지만, 유리 자체는 놀랍도록 깨끗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프레임을 손으로 훑어봤다.
문양은 어느 나라 글자 같기도 했고, 그냥 장식용 무늬 같기도 했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질감은 오래됐지만 단단했다.
썩은 곳 하나 없이, 마치 몇 백 년을 그대로 버텨온 것 같았다.
(이런 걸 왜 헛간에 방치해뒀지.)
나는 먼지를 손으로 쓸어내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내 모습이 비쳤다.
헛간 안, 흐트러진 농기구들,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까지 그대로.
나는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대고 살펴봤다.
반년 사이 볕에 그을린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냥 오래된 거울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거울 속 풍경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분명 방금 전과 똑같은 헛간 안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농기구의 위치가, 아주 조금, 원래와 달랐다.
벽에 걸려 있던 호미가, 거울 속에서는 조금 더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이번엔 정상이었다.
먼지 낀 거울, 헛간의 흐린 빛, 내 얼굴.
그냥 오래되어서 표면이 울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손끝으로 유리 표면을 톡톡 두드려봤다.
단단하고, 차가운, 그냥 유리였다.
나는 괜히 헛웃음을 짓고는 거울에서 몸을 돌렸다.
헛간 정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오늘은 그냥, 저 거울을 발견한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그날은 그렇게 넘겼다.
저녁에는 텃밭에서 딴 상추로 쌈을 싸 먹었고, 마루에 앉아 어두워지는 산을 바라봤다.
산등성이 위로 별이 하나둘 떠올랐다.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이따금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마루에 등을 대고 앉아 그 모든 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낮에 본 거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거, 그냥 착각이었을 거야.)
그렇게 몇 번을 되뇌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계속 신경 쓰였다.
밤이 깊어지고 나서, 나는 손전등을 챙겨 다시 헛간으로 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낮에 본 그 흔들림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마루에서 몸을 일으킬 때, 발밑에서 마른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손전등 불빛이 흔들리며 앞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 감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헛간 문을 열자 안은 새까맸다.
손전등 빛이 거울을 향했다.
거울 표면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조금 더 다가갔다.
발밑에서 짚더미가 바스락거렸다.
공기는 낮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거울 속에는 손전등 빛과 내 모습이 비쳤다.
그런데 그 배경이, 헛간이 아니었다.
나무들이었다.
키가 아주 큰, 본 적 없는 형태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안개가 그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손전등을 든 손을 그대로 멈췄다.
(이게 뭐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지만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
심장 소리가 귓속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헛간의 어둠과 거울 속 안개가 대비되어, 마치 거울이 다른 세계를 오려 붙인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레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거울 속 나무 사이로, 무언가 스치듯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그림자는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다른 자리에서 스치듯 나타났다.
마치 거울 저편에서 무언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낯선 파문이 거울 표면에 일었다.
마치 물속에 돌을 던진 것처럼.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전등을 쥔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등 뒤로는 헛간의 어둠이, 눈앞으로는 거울 속 푸른 안개가 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유리 표면에 닿기 직전이었다.
(닿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손은 이미 거의 다가가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도, 손을 거두지 못했다.
호기심인지, 두려움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각이 손끝까지 밀려와 있었다.
손끝이 유리에 닿았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하고, 부드러운, 물 같은 감각이 전해졌다.
손가락이 거울 표면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유리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어떤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손을 물속에 담그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거울은 다시 그냥 유리처럼 굳은 채, 헛간의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손끝을 살펴봤다.
아무 상처도, 아무 흔적도 없었다.
그저 방금 전까지도 서늘한 감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다시 손을 넣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거울 속에는 다시 헛간의 낡은 풍경만이 비치고 있었다.
농기구들, 짚더미, 그리고 내 얼굴.
그런데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 고요한 유리 표면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