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인님, 낙제생도 통하나요?

3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나는 자꾸 가방 지퍼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 은은한 빛을 확인했다. 손으로 지퍼를 살짝 눌러 틈을 좁히고, 그래도 빛이 새어 나오면 무릎으로 가방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다행히 버스 안이 어두웠고, 저녁 시간대라 승객들도 다들 휴대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어서 내 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옆자리 아저씨가 이 빛을 봤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가방 속에 야광 스티커라도 붙였나 싶겠지, 라고 생각하며 픽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어떻게 피할지 걱정하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집에 들어가서 F등급 성적표를 어떻게 숨길지, 재수를 한다고 말할지 아니면 그냥 취업 준비를 한다고 둘러댈지 머릿속으로 대본을 짜고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내 무릎 위에는 그런 걱정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아니 심각하다기보다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물건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지도를 무릎 위에 펼쳐놓고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산세를 표시한 것 같은 구불구불한 선들, 알아볼 수 없는 한자로 뒤덮인 표기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에 붉게 찍힌 도장 하나. 그 도장 모양이 이상하게도 자꾸 시선을 끌었다. 마치 눈알처럼 생긴 원 안에 소용돌이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들여다보고 있으면 소용돌이가 진짜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만 원이었다고. 노점에서 할아버지가 파는 잡동사니 사이에 껴 있던, 그냥 낡아 보이는 지도 한 장이었다. 반값도 아니고 만 원, 그것도 흥정 한번 안 하고 산 물건이 이런 사기를 칠 줄은 몰랐다. 버스에서 내려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도 표면에 있던 빛이 갑자기 확 밝아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골목은 텅 비어 있었고,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며 노란빛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럴 때 하필 사람이 없다는 게 더 불길한 징조인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지도 위로 문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걸 지켜봤는데, 종이 위로 마치 먹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글자가 한 획씩 그려지고 있었다. 필체는 정갈했고, 마치 누군가 붓으로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쓰는 것처럼 획의 굵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연이 있는 자에게 나의 동부(洞府)로 오라.] 그 문구가 완성되는 순간 지도 전체가 한 번 크게 진동했고, 그 진동이 손끝을 타고 팔뚝까지 전해지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지도를 놓칠 뻔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이건 정전기나 착각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명확한 현상이었다. 정전기였다면 이렇게 규칙적으로, 이렇게 또렷하게 손목까지 저릿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이 있는 자'라니, 그게 나라는 건가. 만 원에 산 지도 한 장이 나한테 오라고 하다니, 이런 전개는 인터넷 소설에서나 보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주인공이 우연히 얻은 물건이 사실은 엄청난 보물이었고, 그걸 계기로 인생이 뒤바뀐다는 그런 이야기. 나도 그런 소설 몇 편 읽어봤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비웃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냐고, 다 작가가 편하게 쓰려고 만든 설정 아니냐고. 그런데 손안에서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는 종이의 감촉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손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지도를 문질러보고, 뒤집어보고, 다시 앞면을 확인했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나한테 확인해보라고 배짜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니 아버지 김태준은 다행히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고,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신발장 옆에 아버지의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 있지 않은 걸 보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같은 날 아버지와 마주쳤다면 성적표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이 지도부터 들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들이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걱정하는 아버지의 얼굴,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말, 뭐 그런 것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채 한참을 들여다봤다. 책상 스탠드를 켜고 지도 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종이 특유의 냄새, 오래된 먹 냄새 같은 게 코끝을 스쳤다. 이게 정말로 오래된 물건이긴 한 모양이었다. 지도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지명 같은 게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경기도 외곽 어느 산 이름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 지명을 검색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그 산은 몇 년 전부터 입산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지반 붕괴 위험'이라는 뻔한 표어와 함께 출입 통제 안내판 사진이 몇 장 떠 있었다. 사진 속 안내판은 녹이 슬어 있었고, 그 옆에 쳐진 철조망도 오래돼서 늘어져 있었다. 몇몇 등산 커뮤니티에는 그 산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거나, 안개가 이유 없이 짙어졌다는 글도 올라와 있었지만 조회수가 낮은 걸 보니 그마저도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사진들을 훑어보며 픽 웃었다. 지반 붕괴 위험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국가에서 뭔가를 숨기고 싶을 때 쓰는 전형적인 문구가 아닌가. 차라리 '외계인 출현 지역'이라고 써놓는 게 더 솔직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지도를 접어 다시 가방에 넣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F등급을 받은 인생, 선도대학교도 물 건너간 인생, 여기서 뭔가를 잃을 게 남아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매번 나한테 "너는 뭐가 되려고 이러냐"라고 물었고, 나는 매번 대답을 못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지도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고 싶었다. 그게 무모한 결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밤늦게 입산 금지 구역으로 혼자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지반 붕괴가 진짜 이유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아니 뭔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연이 있는 자, 라니. 그게 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나는 배낭에 손전등과 물병, 여벌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손전등은 두 개나 넣었다. 하나는 배터리가 약할지도 몰랐고, 산속에서 손전등이 꺼지는 상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물병도 두 개, 초콜릿 바 몇 개와 라이터까지 챙기고 나서야 배낭 지퍼를 닫았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 결정인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방문에 귀를 대고 거실 쪽 소리를 살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아버지가 거실에서 뒤척이는 소리를 확인한 후 나는 창문을 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창틀을 넘을 때 무릎이 살짝 부딪혔지만 다행히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골목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가방 속 지도가 다시 한번 옅게 진동했는데, 그 진동은 마치 나를 재촉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심장 박동 같았다. 이게 살아 있는 물건인가, 아니면 그냥 어떤 장치가 반응하는 것일 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늦은 밤이라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전광판만 혼자 깜빡이며 다음 버스 도착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산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잖아.' 배낭끈을 다시 한번 고쳐 메고, 가방 속 지도를 손끝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정류장을 비추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가슴을 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 버스에 오르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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