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휴대폰 화면에 뜬 문구를 세 번쯤 다시 읽고 나서야, 나는 이게 오타나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국가 적성고사 결과 통보] [영맥 개방률: 3.2%] [종합 등급: F] — 딱 세 줄. 인생을 요약하는 데 세 줄이면 충분하다는 걸 이 나라 교육부는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생각조차도 지금은 사치스러운 여유에 가까웠다. 나는 화면을 끄고 다시 켜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관대하게 굴지 않았다. 여전히 F였고, 여전히 3.2%였다.
교실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누군가는 S급이 떴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고,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뒷줄에 앉은 애들까지 다 일어나서 축하한다며 몰려들었다. 그 옆에서는 B급을 받은 아이가 자기는 이제 인생 끝났다는 듯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는데,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너는 그래도 B잖아, 이 자식아.' B는 명문대는 아니어도 지방 선도전문학교 정도는 갈 수 있는 등급이었고, 나는 그 밑에, 그 밑의 밑에, 사실상 바닥에 있었다. 알파벳으로 등급을 매기는 이 나라 시스템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D나 E쯤에서 끊어줬으면 그나마 위로가 됐을 텐데, 굳이 F까지 밀어붙여서 인간을 등급 밖으로 밀어내는 저 알량한 서열 감각이라니.
F. 알파벳 스물여섯 개 중에서도 굳이 여섯 번째 글자를 골라 붙여놓은 이 등급은, 영맥이 열리다 만 것도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닫혀 있었다는 뜻이었다. 국립 선도대학교는, 내가 중학교 때부터 교실 뒷벽에 붙여놓고 매일 쳐다보던 그 학교 배지는,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옆자리 애가 내 성적표를 슬쩍 넘겨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동정하는 표정도 아니고 비웃는 표정도 아닌, 그냥 못 볼 걸 봤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비웃어줬으면 마음이 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도현." 이성민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이미 상담실 문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몸이 알아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다리가 기억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온 건지 헷갈렸다. 선생님은 책상 위에 놓인 내 성적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맥 개방률 3.2%면, 사실상 일반인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담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위로랍시고 하는 말인데도 문어체 존댓말로 사무적으로 던지니까, 위로인지 판결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사람은 위로할 생각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하는 것뿐이고, 그게 이 사람 나름의 예의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뭘 할 수 있는 겁니까, 선생님?" 내가 묻자, 선생님은 서류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일반대 진학, 혹은 취업. 선도 계열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훅 꺼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심장이 유난히 크게 뛰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미묘하게 차가워지는 것도 알아챘다. 나는 애써 그 박동을 무시하며 픽 웃어 보였다. 이럴 때 웃지 않으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울기라도 하란 말인가. "선생님, 그래도 F는 F 나름의 낭만이 있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낭만은 성적표에 안 적혀 있습니다." 저 대답을 듣고 나니 오히려 웃음이 났다. 이 사람은 농담을 받아칠 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안 받아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선생님은, 저 같은 애들을 몇 명이나 보셨습니까?" 나는 물었다. 순전히 시간을 끌기 위한 질문이었다. "매년 있습니다. 전교에서 한두 명 수준입니다." "그 애들은 지금 뭐 하고 삽니까?" "제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서류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담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더 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담실을 나오면서 나는 이 모든 상황이 어이없을 만큼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였다면 여기서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거나, 숨겨진 혈통이 각성하거나, 뭔가 그럴싸한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내 인생은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복도 벽에 걸린 국립 선도대학교 홍보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배지를 목에 건 학생이 웃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그 웃음이 오늘만큼 얄밉게 보인 적이 없었다.
복도 끝에서 박준서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녀석인데, 이번 적성고사에서 C를 받았다면서도 세상 다 산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야, 너는 몇 나왔어?" 준서가 묻는 순간 나는 잠깐 대답을 고르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F." 준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게 보였는데, 그건 동정도 아니고 놀라움도 아닌,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애매한 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방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등급을 말한 것처럼 보는 눈이었다. "그거… 재검사 안 돼?" "국가 시험인데 재검사가 되겠냐." 내가 대답하자 준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저 녀석은 늘 이랬다. 곤란해지면 화제를 돌리는 게 특기였고, 그 특기가 지금은 오히려 고마웠다.
"아, 맞다, 너 예전에 산 좋아했잖아. 우리 삼촌이 그러는데 황학동 고물시장에 요즘 이상한 물건들이 많이 나온대. 옛날 유물 파는 사람들이 늘었다나. 한번 가볼래?"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 딱히 유물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 얼굴을 봐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낯선 골목을 걷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이상한 물건이라니, 뭐가 이상한데?" 내가 묻자 준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그냥 삼촌이 그렇게 말했어. 옛날 문양 새겨진 돌덩이니 부적이니, 뭐 그런 거 파는 노점이 늘었다고. 요즘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 많잖아." 나는 딱히 그런 취향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취향을 따질 처지도 아니었다.
집에는 아버지 김태준이 있을 시간이었다. 야근이 잦아 얼굴 보기 힘든 아버지였는데, 오늘따라 하필 일찍 퇴근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성적표를 들고 그 앞에 서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 나는 이미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별다른 기대를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무표정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기대였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크게 화를 내주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그냥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버릴 사람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낡은 골목을 헤매는 게 훨씬 견딜 만할 것 같았다.
"준서야, 나 혼자 가볼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준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지하철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준서가 뭐라고 외쳤지만, 이어폰도 꽂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준서의 목소리가 어떤 위로였을지, 아니면 그냥 잘 가라는 인사였을지,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다시 켜서 성적표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F. 3.2%. 여전히 그대로였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황학동. 이름만 들어봤지 가본 적은 없는 동네였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성적표 따위와는 상관없는 낡고 지저분한 골목이었다. 지하철 안내판에 뜬 노선을 확인하며, 나는 이 F라는 알파벳이 오늘 하루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갈지, 그것도 모르는 채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