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인님, 낙제생도 통하나요?

2화

F등급. 오늘 아침 각성국 판정실 벽에 붙어 있던 전자 스코어보드에 내 이름과 함께 떠오른 그 알파벳 하나가, 지금도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영맥 개방률 3.2퍼센트. 판정관은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다음 생애엔 다른 유전자를 받아보시길" 같은 말을 태연하게 던졌는데, 그 순간 나는 화를 낼 힘도 없어서 그냥 웃었다. 웃긴 상황에서는 웃는 게 맞으니까. 그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래서 나는 판정실을 나온 뒤로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어쩌다 보니 황학동 고물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누가 물으면 딱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냥 사람 많은 곳, 시끄러운 곳, 아무도 내 등급 따위에 관심 없는 곳을 찾아 걷다 보니 다다른 곳이었을 뿐이다. 황학동 고물시장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훨씬 낡아 있었다. 좁은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좌판마다 먼지 앉은 라디오와 이 빠진 그릇, 녹슨 공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고, 습기와 쇠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는데,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는 누구도 내 영맥 개방률이 몇 퍼센트인지 묻지 않을 테니까. 판정관도 없고, 스코어보드도 없고, 그냥 낡은 물건과 낡은 사람들만 있는 곳. 나는 이 골목의 무심함이 고마웠다. 골목을 걸으며 좌판을 하나씩 훑어봤다. 어떤 좌판에는 옛날 만화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누가 쓰던 건지 모를 의족 하나가 뜬금없이 놓여 있었다. 주인들은 대부분 접이식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 하나 없이, 오히려 손님이 오면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이 바닥의 룰이 원래 이런 건가,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사를 하는 건지 시간을 때우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이 무심함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 나는 별다른 목적 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유독 어두운 구석 자리에 좌판을 펼쳐놓은 노인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좌판들이 형광등을 밝혀놓은 것과 달리 그 자리에는 낡은 등유 램프 하나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좌판 위에는 부적 몇 장과 청동 거울, 낡은 지도 뭉치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다른 좌판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이 구석만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이질감에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학생, 뭐 찾는 거 있나?" 노점상 최씨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걸걸했고, 눈빛은 이상하게도 상인 특유의 계산적인 느낌보다는 그냥 심심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나이는 육십쯤 되어 보였는데, 손등에는 굵은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손톱 밑에는 오래된 흙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장사꾼치고는 손이 너무 거칠어 보였다. "딱히요. 그냥 구경하는 겁니다." 내가 대답하자 최씨는 킥 웃으며 램프 심지를 손끝으로 조정했다. 심지가 조금 더 밝아지면서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깊게 새겨졌다. "구경만 하다가 인연 만나는 게 이 바닥 룰이지."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좌판 위를 훑어보다가, 지도 뭉치 맨 아래에 깔려 있는 누렇게 바스러진 한 장에 눈이 멈췄다. 종이는 분명 낡았는데, 그 위에 그려진 필체와 붉은 인장 같은 도장은 이상하게도 색이 선명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종이가 삭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인데, 그 위에 그려진 잉크만 방금 찍은 것처럼 붉었다. 이런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조합을 보면 보통은 위조품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게 상식적이겠지만, 나는 그 붉은빛에서 뭔가 다른 냄새를 맡았다. "이건 뭡니까?" 내가 묻자 최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쓰나, 나도 모르지. 강원도 어디 산속 고물상에서 사온 건데, 산신각 지도라고 하던가." "산신각 지도라니, 무슨 관광 안내도 같은 겁니까?" 나는 최대한 심드렁하게 물었다. 최씨는 대답 없이 그냥 웃기만 했는데, 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뭔가를 숨기는 사람의 웃음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냥 진짜로 몰라서 웃는 걸지도 모르고. 이 노인장의 표정에서는 확신도 거짓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만 원만 줘." 만 원. 이 낡은 종이 한 장에 만 원이라니, 사기가 아니면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했다. 편의점 도시락 두 개 값이면 살 수 있는 이런 종이 쪼가리에 만 원이라는 값을 붙이는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이 노인이 나를 그냥 봤을 때 뭐라도 뜯어낼 수 있는 학생으로 판단한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지갑을 열고 있었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이성이 나중에 따라오는, 이상한 순서였다. "이거 진짜 강원도에서 가져온 거 맞습니까?" 내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며 물었다. "맞다니까. 못 믿겠으면 안 사도 돼." 최씨의 대답은 짧고 무심했다. 흥정할 여지조차 안 주는 태도였다. 나는 결국 흥정도 못 해보고 그냥 만 원을 건넸다. F등급 판정 받은 날 이런 걸로 흥정하겠다고 시간 쓰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니까. 돈을 건네고 지도를 받아 든 순간, 손끝에서 미묘한 저릿함이 느껴졌다. 정전기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넘기기에는 감각이 좀 더 깊었다. 마치 종이 안쪽에서 뭔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저릿한 감각이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정전기라면 이렇게 깊게 들어올 리가 없는데. 나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지도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학생, 그거 잘 챙겨. 이상하게 손을 안 놓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최씨가 뒤에서 던진 말이 이상하게 오래 귀에 남았다. 그 말투가 이상하게 걱정스러운 건지 아니면 그냥 흘려 말한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나는 잠깐 돌아서서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노인은 이미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이상 뭘 더 물어봐도 대답이 안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비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F등급 판정 받은 날, 사기꾼 같은 노인한테 만 원을 주고 알 수 없는 종이를 산 남학생. 이 이야기를 나중에 누구한테 하면 다들 웃을 것 같았다. 아니, 웃길 사람이 있기나 할까. 요즘 내 주변에는 이런 헛소리를 들어줄 만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다들 자기 등급 관리하기 바쁜 판에, F등급짜리가 산신각 지도 샀다고 하면 동정의 눈빛이나 받으면 다행이겠지. 골목을 빠져나오는 길에 다시 좌판들을 훑어봤다. 여전히 사람들은 무심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각성자 관련 정책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각성자 정책이 나랑 무슨 상관이겠나. 나는 이제 그냥 평범한 F등급 시민일 뿐이니까.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며 가방을 고쳐 메는데, 그 안에서 뭔가가 미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휴대폰인가 싶었지만, 휴대폰은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잠깐 멈춰 서서 가방 속을 곱씹어봤다. 진동이라니, 종이 쪼가리가 알람 기능이 있을 리도 없고. 나는 이 상황을 애써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려다가 실패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어 지도를 꺼냈는데, 그 순간 지도 표면 전체가 옅은 청백색으로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종이 위에 그려진 필체를 따라 빛이 흐르는 것처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일렁였다. 이건 절대로 만 원짜리 골동품에서 나올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나는 지도를 든 채로 잠깐 굳어버렸다. 손바닥에 닿은 종이의 감촉은 그냥 낡은 한지였는데, 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은 도저히 종이의 물성으로 설명이 안 됐다.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 몇몇이 나를 힐끗 쳐다봤지만, 아무도 이 빛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만 보이는 건가, 아니면 다들 못 본 척하는 건가. 옆을 지나가던 회사원 하나는 그냥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지나쳤을 뿐, 지도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감각을 억누르며 지도를 다시 접어 넣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지만, 애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계단을 계속 올랐다. 이건 분명, 만 원짜리 물건이 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F등급 판정 받은 날 하루 종일 재수 없는 일만 있었는데, 이제는 정체불명의 발광 물체를 가방에 넣고 다니는 처지가 됐다. 최씨의 마지막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이상하게 손을 안 놓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이 이제 와서 소름 끼치게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 지퍼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이 종이 한 장이 앞으로 내 인생을 얼마나 뒤흔들어놓을지 전혀 짐작도 못 한 채로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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