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계약했다, 대가는 몰랐다

5화

그날 밤,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뚱보가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일정했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그 규칙적인 리듬을 세다가 문득 이상한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 뚱보의 얼굴을 보면서, 뚱보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느끼는 게 아니라 관찰하고 있었다. 작년 겨울, 열이 40도까지 올라 쓰러졌을 때. 뚱보가 밤새 나를 업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날 눈이 왔다. 뚱보의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는데도 계속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으면서도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 형, 조금만." 그 목소리, 갈라진 그 목소리.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병원 대기실 의자의 초록색, 뚱보 이마에 맺힌 땀방울, 창문 밖으로 쏟아지던 눈. 전부 다 기억났다. 그런데 그때 느꼈던,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벅찼던 감정. 지금 그 장면을 떠올려도, 그 감정이 예전 크기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색은 알아볼 수 있는데, 그 순간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뚱보의 어깨를 살짝 건드려봤다. 따뜻했다. 따뜻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온기가 예전처럼 가슴 어딘가를 뭉클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좋아하는 사람인데. 분명 은인인데. 그런데 그 마음의 자리에, 뭔가가 비어 있었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으로 낙인을 다시 눌렀다. "탐식령." 빛이 반응했다. "또 불렀네." 목소리에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데이터를 읽는 듯한, 딱딱한 어조. "되돌릴 방법 없어?" "있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뭔데." "내가 흡수한 감정을 다시 돌려줄 수 있어. 대신, 네가 얻은 힘도 같이 사라져." "힘이 사라지면?" "시험 합격은 유지돼. 이미 벌어진 사건은 안 바뀌어. 다만 앞으로 네가 이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도 함께 사라져." 숨을 삼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네가 조립할 때 느꼈던 그 감각, 손끝이 저절로 움직이는 그 느낌. 그거 전부 이 힘에서 나온 거야. 힘이 없어지면 넌 다시 평범한 손으로 돌아가." "평범한 손이면 지금까지 만든 것들은?" "남아. 하지만 그 이상은 못 만들어. 딱 거기까지." "지금이야. 계약 첫 대가는 회수 창구가 짧게 열려 있어. 지금 결정하면 돌릴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이 창구도 닫혀." "창구가 언제 닫히는데." "자정."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1시 20분. 40분. 40분 안에 결정해야 했다. 힘을 포기하면, 뚱보에 대한 감정은 온전히 돌아온다. 하지만 그 힘이 없으면, 앞으로의 조립도, 앞으로의 시험도, 다시 그 두 달 같은 실패로 돌아갈지 몰랐다. 힘을 유지하면, 뚱보와의 기억 한 조각은 계속 비어 있는 채로 남는다. 대신 신분 상승의 길은 열린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게 이 계약의 첫 번째 조항이야." "두 번째 조항은?" "없어." "왜 하나뿐이야." "충분하니까."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낙인이 은은하게 빛났다. 빛의 색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마치 내 결정을 재촉하듯이. 뚱보의 코 고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평범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갑자기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방을 나와 작업장으로 걸어갔다. 복도는 차가웠다. 발바닥에 닿는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감정은 무뎌졌는데 감각은 그대로였다. 그게 더 이상했다. 작업대 위, 완성된 A급 엔진이 놓여 있었다. 합격증 서류도 그 옆에 있었다. [기계사 예비 등록증 - 이도현] 서류에 적힌 이름을 손끝으로 만졌다.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매끈했다. 이 종이 한 장이 두 달간의 절망을 끝냈다. 두 달 전, 신분 카드 갱신 마감이 코앞이었을 때. 사무소 창구 직원이 서류를 내던지듯 돌려주며 말했다. "자격 미달입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던 순간, 뒤에서 여우가 웃던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감정은 흐려졌는데 그 웃음소리만은 여전히 생생했다. 영구 무신분의 위협. 그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는 몸으로 알았다. 신분 카드가 없으면 정식 작업장에 발도 못 들인다. 정식 작업장에 못 들어가면 부품도, 재료도,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뚱보의 저축은 갚을 길이 영영 없어진다. 지금 이 서류가, 그 모든 위협을 끝냈다. 오후 11시 45분. 15분 남았다. "결정했어?" 탐식령이 물었다. 나는 서류를 다시 내려놓았다. 뚱보와의 기억, 그 감정의 무게. 그것은 분명 소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조금 흐려졌다고 해서, 뚱보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방금 전, 어깨를 만졌을 때 느낀 온기. 그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크기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힘을 놓으면, 다시 두 달 전의 그 절망으로 돌아가야 했다. 뚱보가 또 저축을 털어야 하고, 여우가 또 비웃을 것이고, 나는 또 무신분으로 남을 것이다. 그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뚱보가 통장을 들고 서 있던 모습. 여우가 팔짱을 끼고 비웃던 모습. 사무소 직원이 서류를 내던지던 손짓. 전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시계를 다시 봤다. 11시 52분. 8분. 손바닥의 낙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마치 답을 기다리며 몸을 태우는 것 같았다. "유지할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탐식령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비웃음인지, 만족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거야." "넌 계산이 빠른 애야. 손해와 이득을 재는 게 몸에 배어 있어. 그런 애들은 감정보다 결과를 택해." "그게 나쁜 거야?" "아니. 나한테는 좋은 거지." 그 대답에 뭐라 반박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탐식령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자정이 지났다. 창구가 닫혔다는 느낌이 몸으로 전해졌다. 손바닥이 순간 뜨거워졌다가, 서서히 식었다. 낙인이 한 번 강하게 빛나고 잠잠해졌다. 나는 작업대에 걸터앉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 엔진의 표면을 손끝으로 쓸었다. 차가웠다. 차가운데도, 이 엔진을 완성했을 때의 감각만큼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이 남아 있다는 것. 그게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톱니골 전체에 소식이 퍼졌다. 이도현이 정식 기계사 예비 등록증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작업장 골목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누군가는 축하한다고 손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전부 낯선 시선이었다. 어제까지 나를 없는 사람처럼 지나치던 사람들이었다. "축하해요, 형." 여우가 찾아왔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저희 형도 축하한대요. 다음 단계는 정식 3급 시험이죠? 저도 언젠가는." 말투는 부드러웠는데, 그 부드러움 아래 뭔가 날카로운 게 숨어 있었다. 예전에 나를 비웃던 그 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웃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요, 형."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우 뒤에서 낯선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덩치는 작았지만 눈빛이 매서웠다. 나이는 열넷쯤 되어 보였는데, 서 있는 자세부터 만만치 않았다. "저 새 폐품 구역 맡았어요." 여우가 말했다. "거기, 원래 뚱보 형네가 쓰던 구역인데." 그 말을 하는 여우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투였다. "형네 구역이 갑자기 왜 저 애한테." "제가 위에다 얘기했거든요. 이제 뚱보 형은 저희 형 밑에서 일 안 해도 되잖아요. 도현 형이 정식 기계사 됐으니까." 말이 논리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그 논리 안에 뚱보의 자리가 없었다. 나는 뚱보를 돌아보았다. 뚱보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 있었다. 지금까지 뚱보는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저축을 다 털렸을 때도, 여우가 비웃었을 때도, 뚱보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그 구역, 나한테는 통보 안 됐는데." 뚱보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어제 결정된 거라서요. 형도 이제 좋은 일 생겼으니까, 서로 좋게 넘어가면 되잖아요." 여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뚱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어떤 미안함도 없었다. 나는 손을 쥐었다. 뭔가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손바닥의 낙인이 다시 미열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다음 거래를 기다린다는 듯이.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