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잔상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반투명하던 날개가 서서히 실체처럼 변해갔다. 깃털 하나하나의 결까지 선명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마치 안개가 걷히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조각상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몸의 감각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 손끝이 저절로 굽어드는 긴장. 이건 단순한 스킬 발동이 아니었다.
소녀의 몸에서 냉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바닥 전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발밑에서 시작된 서리가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방 몇 미터를 뒤덮었다. 랜턴 불빛에 반사된 서리 결정이 눈부시게 흩어졌다. 마치 작은 별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위험했다.
"괜찮아?"
나는 물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표정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눈썹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폭주의 조짐이었다. 이전에 봤던 몬스터들의 폭주와는 결이 달랐다. 저건 짐승의 광기가 아니라, 억눌린 무언가가 한계를 넘어서려는 발작 같은 것이었다. 식량 하나로 억눌린 무언가가 다시 터져 나오려는 듯했다.
체내 마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반응하며 일어서는 감각.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이번엔 그 크기가 달랐다.
[온기보존] 스킬이 저절로 발동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스킬은 원래 대상과의 접촉, 혹은 근접한 거리에서만 발동한다. 지금까지 이 스킬을 써본 대상은 대부분 작은 동물이나 사람 정도였다. 그마저도 마력 소모는 미미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만한 존재감을 가진 개체일 경우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애초에 이 스킬이 이런 규모의 냉기 폭주를 감당할 수 있게 설계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소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주변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어 보일 정도였다. 랜턴 유리에도 서서히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도망칠까, 그대로 지켜볼까, 아니면 개입할까. 셋 중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저 눈을 보고서야 알았다. 저건 도움을 요청하는 눈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할 방법조차 모르는 눈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미안, 좀 놀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었다. 손끝이 이미 시렸다. 공기 자체가 살을 베는 것 같았다. 그래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소녀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차가웠다. 얼음을 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는 게 느껴졌다. 아직 완전히 얼어붙지 않은 무언가.
순간 [온기보존] 스킬이 발동했다.
[스킬 발동: 온기보존 — 대상의 체온 안정화 시도]
손끝에서 옅은 온기가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실처럼 뽑혀 나가 소녀의 손목으로 흘러드는 감각이었다. 소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으……!"
처음으로 소녀가 목소리를 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었다. 냉기와 온기가 부딪히며 주변 공기가 요동쳤다. 마치 두 개의 기류가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 같았다. 서걱, 서걱. 서리 결정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소녀의 발밑에서 얼음 조각들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버텨야 했다.
손을 놓으면 저 폭주가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나도, 이 좁은 던전 통로도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목을 놓지 않았다.
온기가 계속 흘러나갔다.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는 감각이 들었다. 다리에서부터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원래 이 스킬은 이렇게까지 마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평소라면 손끝이 미열을 느끼는 정도로 끝났을 스킬이었다. 상대의 마력량이 지나치게 크다는 뜻이었다. 이 조그마한 몸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걸 감추고 있는 걸까.
"괜찮아, 괜찮아……."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소녀에게 하는 말이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말이라도 뱉지 않으면 손을 놓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한 번, 냉기가 흔들렸다. 마치 균열이 생긴 유리처럼, 폭주하던 기세가 처음으로 주춤했다.
두 번, 소녀의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팽창하던 냉기가 서서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세 번, 반투명하던 날개의 잔상이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실체를 갖춰가던 형상이 도로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폭주의 기운이 잦아들었다. 바닥을 뒤덮었던 서리도, 살을 베던 냉기도 조금씩 온도를 되찾아갔다.
소녀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지만, 놓지 않았다. 손을 놓는 순간 이 아이가 다시 저 안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아서였다.
랜턴 불빛이 흔들렸다. 던전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서리 폭풍이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바닥엔 물기만 남아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 눈빛에 남은 건 더 이상 경계만이 아니었다. 낯선 온기에 대한 의문, 그리고 아주 희미한 안도.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 짐승 같던 눈빛과는 완전히 달랐다.
"너……."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분명한 언어였다. 사람의 말이었다.
"안 도망가?"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짐승처럼 굴던 존재가 던진 첫 말이 그거였다. 나는 잠깐 멍하니 소녀를 바라봤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안심이 되어서인지 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도망갈 곳도 없어."
사실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와서 등을 돌린다고 뭐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저 눈을 보고 도망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소녀의 손이 천천히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작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놓지 않겠다는, 아니 놓아지지 않는 듯한 붙잡음이었다. 마치 놓는 순간 다시 혼자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던전 전체가 낮게 진동했다.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벽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더 깊은 곳에서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이 작은 폭주 하나가,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잠을 깨운 것처럼.
소녀의 몸이 다시 경직됐다.
옷자락을 붙잡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안도가 순식간에 다시 긴장으로 뒤바뀌었다.
"이건…… 뭐지?"
내가 물었다.
소녀는 대답 대신 내 옷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 손끝이 다시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가, 더 깊은 곳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소녀의 눈동자가 다시 그 텅 빈, 초점 없는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