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앙님, 밥은 드셨어요?

2화

미궁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조용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60층까지 가는 길, 계단은 끝이 없어 보였다. 한 층을 내려설 때마다 공기가 한 톤씩 무거워졌다.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층이 내려갈수록 점점 낡아갔다. 처음엔 선명했던 문양이 30층쯤부터 흐릿해지고, 40층을 넘어서자 반쯤은 지워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이 아래에 뭔가를 봉인해둔 것처럼. 누군가 일부러 지운 걸까, 아니면 시간이 지운 걸까.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혼자였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지원조 두 명이 45층까지 동행했다.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었다. 던전 안에서 말을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강태오는 정작 나서지 않았다. 촬영팀과 함께 상층에서 대기 중이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늘 앞장서던 사람이 이런 순간엔 슬쩍 뒤로 빠진다.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원래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여기서부터는 진짜 혼자 가셔야 합니다." 지원조 대장이 말했다. 목소리에 미안함이 살짝 묻어 있었다. "압니다." 짧게 대답했다. 감정을 섞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은 무서웠다. 하지만 그걸 티 내는 순간 지원조가 규정을 어기고 따라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문제가 더 커진다. 45층 게이트에서 지원조가 돌아섰다.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침묵이 짙어졌다.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따라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랜턴 불빛 하나가 세상의 전부가 됐다. 그 작은 원 밖은 전부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대도 알 방법이 없었다. 50층을 지나면서부터 벽의 질감이 달라졌다. 차갑던 돌벽이 어느 순간부터 미끈거리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표면에 얇은 습기가 배어 있었다. 이 던전에 수분이 있을 리 없는데. [온기보존] 스킬 창이 반응했다. 마력이 이유 없이 흔들렸다. 60층으로 향하는 통로 벽면에 금이 가 있었다. 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온기가 느껴졌다. 이 던전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온기였다. [온기보존] 스킬이 반응했다. 체내 마력이 저절로 요동쳤다. 뭔가가, 살아있는 무언가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였다. 걸음을 멈추고 벽에 손을 댔다. 미세한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심장 박동 같은 리듬이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여기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발이 먼저 움직였다. 계단을 다 내려서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천장이 무너져 있었고 잔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돌덩이 사이로 랜턴 빛이 비치자 먼지가 은빛으로 부서졌다. 중앙에는 거대한 석상 같은 게 부서진 채 놓여 있었다. 용의 형상이었다. 날개, 뿔, 비늘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아니,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다만 그 석상 표면에 실핏줄처럼 균열이 뻗어 있었고, 균열 속에서 옅은 빛이 맥동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이건……." 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무전을 켰다. "관제실, 60층 진입 완료. 이상 지형물 발견했습니다. 석상 형태의……." 답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관제실, 들립니까?" 잡음만 흘러나왔다. 세 번째로 눌렀다. 여전히 침묵.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전이 끊긴 던전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수십 개의 던전을 돌았지만 이런 식으로 완전히 끊기는 경우는 없었다. 방해 마력이 있는 던전에서도 잡음 정도는 통했다. 이건 다르다. 뭔가가 신호를 삼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한 걸음.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두 걸음. 석상의 균열이 더 넓어졌다. 빛이 균열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 걸음. 무언가 깨어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쩌적. 그 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랜턴 불빛이 흔들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몸이 먼저 알아챈 모양이다. 속이 뒤틀리는 감각.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발은 붙박인 듯 움직이질 않았다. 도망쳐야 하나, 확인해야 하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럴 때 강태오라면 뭐라고 했을까. 무조건 앞으로 가라고 했겠지. 그 인간다운 대답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발을 뗐다. 생각을 돌리는 것도 일종의 방어였다. 그 순간 석상 잔해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작은 실루엣이었다. 사람 크기의, 웅크린 형체. 숨을 삼켰다. 랜턴을 비추자 은빛 머리카락이 반사됐다. 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잔해 위로 흩어져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형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임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랜턴 불빛을 받아 옅은 금빛으로 빛났다.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동공의 형태부터 달랐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짐승의 눈이었다.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공간을 짓눌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몬스터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위압감과는 결이 달랐다. 몬스터는 위협적이지만 이건 그보다 위, 아예 다른 층위의 존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무전기가 다시 잡음 속에서 살아났다. "이도윤 씨! 즉시 대응 안 됩니다, 대체 뭘 발견하신 겁니까!" 박정호의 목소리가 높았다. 다급함이 그대로 전달됐다. 나는 랜턴 너머의 형체를 바라보며 겨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목소리가 떨렸다. 그 형체가, 소녀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발끝이 잔해를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그 순간 벽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들이 일제히 빛을 뿜기 시작했다. 방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빛이 눈을 찔러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졌다. 관제실 스피커 너머로 비명 같은 경보음이 울렸다. "위험 수치 초과! 즉시 철수하세요, 즉시!" 나는 그 경보를 다 듣지 못했다. 소녀의 시선이 나에게 완전히 고정된 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왔으니까.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칠 생각도, 무기를 꺼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저 금빛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이 온몸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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