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낯선 몸에 갇힌 목소리

4화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가슴을 짚었던 손을 아직 떼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저 먼 곳에서 실을 잡고,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천장의 벽지 무늬를 세는 것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려 했다. 하나, 둘, 셋. 꽃무늬가 몇 개인지도 모르고 세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 방의 원래 주인은 이런 밤을 몇 번이나 견뎠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손끝이 서늘해졌다. 끼익. 방문이 아니었다. 옷장 쪽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옷장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 손잡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환청이다. 그렇게 넘기려 했지만, 이번엔 넘어가지지 않았다. 몸이 그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소환사였던 시절, 결계 안에서 뭔가가 갇혀 있을 때 나던 소리와 비슷했다. 감각이 몸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을 감고, 오래전에 하던 방식으로 정신을 가라앉혔다. 호흡을 세고, 몸의 중심을 찾고, 그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의식을 뻗었다. 예전엔 이 과정이 숙련된 동작이었다. 지금은 오래 쓰지 않은 관절을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 소리만 귓속에서 크게 울렸다. 그러다 아주 희미하게, 실 한 가닥 같은 감각이 잡혔다. 잡았다기보다는, 그것이 먼저 내 쪽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누구야. 나는 그 실을 향해 물었다. 목소리로 말한 게 아니라, 의식으로 물었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시계 초침 소리만 또렷했다.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 아주 작은 진동처럼 뭔가가 돌아왔다. 주인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목덜미부터 등줄기까지 소름이 지나갔다.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계약을 맺었던 소환수들 중 하나였다. 이름까지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어조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애 같은 말투에 묘하게 늙은 느낌이 섞여 있는, 그런 목소리. 어디 있어. 멀어요. 아주 멀어요. 근데 주인님 냄새가 나서요. 냄새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사람의 후각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풍기는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더 의식을 뻗었다. 실을 따라가듯,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어둠을 더듬는 느낌으로. 그 순간, 갑자기 강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마치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어느 지점에서 뭔가에 걸려 더 나가지 못하는 느낌. 벽이라고 해야 할지, 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무언가가 그 너머를 가리고 있었다. 처형당했다고 들었는데. 실 너머의 존재가 물었다. 목소리에 의심과 안도가 섞여 있었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다는, 그런 떨림. 죽었어. 지금은 다른 몸이야. 나는 짧게 답했다. 설명할 게 많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어떻게 이 세계로 넘어왔는지, 이 몸이 원래 누구였는지, 그런 걸 전부 이야기할 여유는 없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처형당한 계약주를 다행이라고 반기는 목소리에는, 뭔가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단순한 반가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버텨온 사람이 겨우 구조선을 발견했을 때 내는 소리 같았다. 너 위험한 거야?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주인님 찾은 게 더 중요해요. 대답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는 말과, 그 뒤에 붙는 어색한 웃음소리 같은 진동이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더 캐물으려 했다. 정확히 뭐가 위험― 그 순간 실이 뚝 끊기듯 사라졌다. 의식을 뻗던 감각이 갑자기 텅 비었다. 마치 전화가 끊긴 것처럼, 아무런 여운도 남기지 않고 조용해졌다. 방 안 온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봤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손을 펴 봤다가 다시 쥐었다. 됐다. 확인했다. 계약은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었다. 어딘가에 내 소환수 중 하나가 살아 있었고, 그것이 이 세계까지 나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소환수가 살아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건, 그 위험이 결국 나에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계약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쪽도 흔들린다. 나는 다시 눕지 않았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까지 그렇게 있었다. 옷장은 그 뒤로 다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잠은 못 잤는데 정신은 오히려 맑았다. 이런 상태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대신 판단력이 둔해지는, 그런 균형. 밥상에서 이루하가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형, 눈 밑에 그늘 심하다. 못 잤어?" "조금." "무슨 걱정 있어?" "아니."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면서 짧게 답했다. 국물이 미지근했다. 밥을 씹는 것도 기계적이었다.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이 여전히 눈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어젯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다. 그건 확실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불안한 걸까. 웃는 얼굴 아래 다른 얼굴이 숨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노아가 그 옆에서 밥을 먹다가 갑자기 물었다. "큰형, 어제 옷장에서 이상한 소리 안 났어? 나는 들었는데." 숟가락을 들다가 멈췄다. 이노아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밥을 먹었다. 이루하가 대신 대답했다. "집이 오래돼서 그래. 나무가 마르면서 그런 소리 나." "그래도 무서웠어." "자기 전에 우유 마셔. 그럼 안 무서워." 이루하가 이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만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나만 옷장 소리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등굣길, 나는 다시 그 목소리를 들으려 시도했다. 걸으면서 의식을 아래로 뻗어봤다. 하지만 낮에는 실이 아예 잡히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듬는 느낌이었다. 밤에만 가능한 건가, 아니면 특정 조건이 필요한 건가. 조건이 뭔지 알아내야 했다. 소환사로서의 본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래 잠들어 있던 습관이 몸을 깨우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는 별일 없었다. 강민재가 몇 번 지나가며 나를 살폈고, 윤하은은 다른 애들과 뭔가를 소곤거리다가 나를 보면 입을 다물었다. 흔한 하루였다. 수업 시간엔 칠판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계속 어젯밤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형이 나 미워해, 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 말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점심시간, 급식실 줄에 서 있다가 문득 손이 저렸다. 실을 잡으려던 감각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아이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식판을 들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나는 다시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흔적을 마주했다. 형, 나 진짜 무서워.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목소리가 들렸다. 낮에는 전혀 안 들리던 목소리가, 방문을 닫는 순간 다시 선명해졌다. 방이라는 공간, 혹은 밤이라는 시간이 조건인 걸까. 아니면 이 몸 자체가 조건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침대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 뭐가 무서워. 형이. 형이 나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형이 누굴 말하는 거야. 루하 형. 순간 멈칫했다. 루하를 형이라고 부른다는 건,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루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첫째처럼 대했다. 뭔가 어긋나 있었다. 나는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너 몇 살이야. 열넷. 루하는. 나보다 형이야. 나는 그 대답에 순간 말을 잃었다. 이루하가 형이라고. 그럼 이 집의 서열이 내가 알던 것과 정반대였다. 이서윤이 첫째, 이루하가 둘째, 그리고 이노아가 막내. 지금까지 아무도 이걸 정정해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이루하도, 이노아도. 다들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왜 다들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 형 아니야. 근데 다들 형이라고 하잖아. 나도 몰라, 왜 그런지. 목소리가 점점 불안정해졌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방 안 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목소리를 낮췄다.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루하가 왜 무서워. 대답이 없었다. 아주 오랜 침묵 뒤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숨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형이 나 미워해. 근데 아무도 몰라. 형이 웃으니까. 그 순간, 창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커튼을 젖혔다. 마당에 이루하가 서 있었다. 어두운 마당 한가운데, 아무 이유 없이. 슬리퍼를 신고, 팔짱을 낀 채로. 바람도 없는데 그의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밝게. 아주 밝게. 나는 그 웃음에서 아무런 온도도 느끼지 못했다. 커튼을 잡은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 안의 목소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나는 유리창 너머로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커튼을 다시 닫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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