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단두대의 나무는 젖어 있었다.
비가 온 지 얼마 안 됐는지, 발밑의 판자가 미끄러웠다. 나는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하늘을 봤다. 잿빛이었다. 왕국을 구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는 날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한 날씨였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내가 구했던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울고 있었고, 몇몇은 침을 뱉었다. 우는 쪽이나 침을 뱉는 쪽이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게 더 웃겼다. 최소한 침을 뱉으면서 눈을 마주치는 게 예의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웅 소환사 노아. 왕국에 대한 반역죄로 참형에 처한다."
누군가 그렇게 읽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떨리는 건 저쪽인데 죽는 건 나였다. 이상한 일이다, 라고 생각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마 그 전에 정신이 먼저 끊겼던 것 같다.
그리고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 무늬가 다른 나무 무늬였다. 나뭇결이 소용돌이치듯 이어져 있었는데, 어릴 때 봤던 문양은 아니었다. 손을 들어보니 손이 작았다. 손톱 밑에 물감이 말라붙어 있었다. 물감을 만진 기억이 없었다.
괜찮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 안에는 책상과 옷장, 그리고 벽에 걸린 달력이 있었다. 낯선 글자들이 낯선 숫자들 옆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왕국의 언어도 아니고, 마법진에 쓰이던 고대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에 들어오는 순간 뜻이 저절로 풀렸다. 몸에 새겨진 지식인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나무 바닥이었는데도, 처형대의 나무와는 다른 온도였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거울 앞에 섰다.
거기 서 있는 건 열네 살 정도의 소년이었다. 마른 어깨, 창백한 얼굴, 눈 밑에 옅게 든 그늘. 내가 기억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손도 아니었다. 나는 원래 스물여덟이었고, 이 몸의 절반쯤밖에 되지 않는 나이였다.
손을 들어 뺨을 만져봤다. 감촉이 낯설었다. 턱선이 여물지 않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스물여덟 해를 살고 죽었는데, 다시 눈을 뜨니 열네 살이라니. 이게 신의 장난인지, 처벌인지, 아니면 그냥 사고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 몸이야.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렸다기보다는 느껴졌다. 뒤통수 안쪽, 목덜미 아래 어딘가에서 울리는 진동 같은 것.
내 몸이라고.
작고, 흐릿하고, 잔뜩 겁먹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환청이다.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처형대에서 목이 잘리기 직전에 정신이 나갔고, 그 충격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라고. 실제로 목이 잘렸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옷장을 열어봤다. 안에는 교복 두 벌과 사복 몇 가지가 걸려 있었다. 사이즈가 다 이 몸에 맞는 걸 보니, 적어도 이 옷장의 주인과 지금의 나는 같은 몸을 쓰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는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펼쳐보니 그림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그림이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 검은 창문, 계단 밑의 그림자. 손톱 밑에 물감이 말라붙어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노아야, 밥 먹어라."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담담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어조였다. 나는 스케치북을 서둘러 덮고 문을 열었다.
식탁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세 사람이 나를 흘긋 보고는 각자 자기 그릇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 짧은 시선의 움직임 안에 이미 뭔가가 담겨 있었다. 반가움은 아니었다. 경계도 아니었다. 그냥, 익숙한 확인. 저 애가 또 나왔구나, 하는 확인.
"또 늦게 일어났네." 남자가 말했다. 신문을 접으며 나를 보지도 않고 하는 말이었다. 이 사람이 아버지구나, 라는 걸 나는 그 말투 하나로 짐작했다. 명령이 습관이 된 사람의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이 몸은 사과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몸에 새겨진 습관인지, 아니면 저 흐릿한 목소리의 잔재인지 알 수 없었다. 입이 먼저 움직이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가는 감각이었다. 낯설었다.
아버지 옆에 앉은 여자아이가 나를 잠깐 쳐다봤다가 다시 눈을 내렸다. 열일곱쯤 되어 보였다. 나중에 이름을 알았다. 이서윤. 누나였다. 그 눈빛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는데, 걱정치고는 너무 짧고 빠르게 지워지는 종류였다. 마치 걱정하는 걸 들키면 안 되는 사람처럼.
어머니라는 사람이 국을 떠서 내 앞에 놓아줬다. 손이 야위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도 아버지의 말투처럼 습관 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표정을 짓는, 그런 종류의 웃음.
그리고 맞은편에,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형, 얼굴에 이상한 게 묻었어."
웃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눈까지는 올라가지 않았다.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나를 재고 있었다. 저울질하는 눈이었다.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뭐가 묻어 있던 게 아니라, 그냥 나를 한 번 움직여보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걸, 손을 닦으면서야 알았다.
이루하. 동생이라고 했다.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유독 부드러운 결이 느껴졌다. 다른 세 사람을 부를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온도였다. 나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티 내지도 않았다.
나는 밥그릇을 받아 앞에 놓았다. 아무도 내게 뭘 먹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았다. 방금까지 방에서 이상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반응은 아니었다. 마치 이런 침묵이 늘 있던 일이라는 것처럼.
됐다. 익숙하지 않아도 익숙한 척하면 된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생각했다. 이 집의 규칙을. 아버지는 말을 짧게 하고, 어머니는 형식적으로 웃고, 누나는 침묵하고, 동생은 웃는다. 그 웃음 뒤에 뭐가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숟가락질을 하면서 슬쩍 식탁 전체를 훑었다. 반찬 그릇의 배치, 자리의 순서, 누가 먼저 젓가락을 드는지. 왕국에서 궁정 만찬 자리에 앉을 때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왔다. 누가 힘이 있고, 누가 힘이 없는지는 밥상머리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다. 이 집에서는 이루하가 제일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걸 나무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몸 돌려줘.
젓가락을 쥔 손이 잠깐 멈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다시 밥을 먹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목소리는 원망도 아니고 애원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쯔음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흔들림이 마음에 걸렸다. 걸렸지만,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부터 학교 다시 나가라. 이번엔 사고 치지 말고."
사고. 그 단어가 걸렸다. 내가 오기 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무슨 사고를 쳤다는 뜻이었다. 나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궁금한 걸 다 물어보는 건 이 몸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 것 같았다. 대신 머릿속에 그 단어를 넣어두었다. 사고. 나중에 꺼내볼 서랍 하나가 생긴 셈이었다.
어머니가 그릇을 치우며 낮게 물었다.
"오늘 도시락 챙겨줄까?"
"괜찮습니다."
또 저절로 나온 대답이었다. 어머니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 대답이 원래 주인의 습관이었는지, 아니면 이 집 자식들 전체의 습관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 집에서는 뭔가를 거절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 있다는 것.
대신 동생을 봤다.
이루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주 예쁘게.
"형, 잘 다녀와. 오늘도 힘내."
힘내라는 말이 왜 위협처럼 들렸는지, 그때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뒷목이 서늘했다. 전생에 내가 죽기 직전, 나를 배신한 사람도 저런 얼굴로 웃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사람의 웃음도, 지금 이루하의 웃음도, 표면은 완벽했다. 문제는 표면 아래였다.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마주 보다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도망친 게 아니라, 전략상 후퇴였다고 스스로 정리했다. 지금은 저 웃음의 정체를 캐물을 시기가 아니다. 몸에 익지도 않은 다리로, 이름도 낯선 학교에, 사정도 모르는 사고까지 짐 지고 걸어가야 하는 첫날이니까.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낡은 가방이었다. 지퍼 한쪽이 고장 나 있었다. 안을 열어보니 교과서 몇 권과 필기구, 그리고 구겨진 종이 한 장이 있었다. 펼쳐보진 않았다. 첫날부터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리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교복을 입으며 다시 거울을 봤다. 열네 살 소년의 얼굴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어색했다. 이 몸의 손은 넥타이를 매는 법을 알고 있었는데, 정작 조작하는 나는 처음이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억이 한 손 안에서 부딪히는 감각이었다.
내 몸이라고 했잖아.
목소리가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대답을 하면, 그 목소리가 진짜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될 테니까.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등 뒤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딱 그 두 마디였다. 뒤돌아봤을 때 누나는 이미 부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그 등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골목의 공기가 차가웠다. 하늘을 잠깐 올려다봤다. 잿빛은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오늘은 처형당하는 날의 하늘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괜찮다. 아직은.
그렇게 첫날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