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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음 날부터, 나는 이 집과 이 교실을 하나의 지형으로 보기 시작했다. 관찰은 원래 내 특기였다. 전생에서 나는 소환수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계약, 조건, 대가. 모든 걸 조건식으로 보는 습관이 이 몸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환수를 다룰 때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웃는 얼굴을 하고도 계약 조건을 어기는 놈들이 있었고, 으르렁대면서도 약속은 끝까지 지키는 놈들이 있었다. 사람도 똑같았다. 그러니 사람도 조건식으로 분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형준. 조건: 명령을 내리면 즉시 수행. 실패 시: 무시. 그는 나에게 어떤 감정도 소비하지 않았다. 그냥 통제 대상으로만 취급했다. 아침에 그가 나를 보는 시간은 정확히 이 초를 넘기지 않았다. 밥을 먹는지, 옷을 입었는지, 신발을 신었는지, 세 가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확인이 끝나면 시선은 다시 신문으로 돌아갔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쓸 곳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목록에 없었다. 어머니 박소영. 조건: 겉으로 웃되 속으로 판단. 그녀는 아침마다 "잘 잤어?"라고 물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시선은 이미 이루하에게 가 있었다. 물어보는 행위 자체가 형식이었다. 대답의 내용은 필요하지 않았다. 어제는 그녀가 내 옷깃을 잡아 정리해준 적이 있었는데, 손끝이 내 목에 닿는 순간 아주 짧게 굳었다. 벌레를 만진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웃으며 "이제 됐네"라고 했다. 그 낙차가 재밌었다. 웃음과 굳음이 같은 손에서 나오는 게. 누나 이서윤. 조건: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안전.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시선을 살짝 비켼다. 마치 나를 보는 게 자기한테 어떤 불이익을 가져다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복도에서 스쳐도, 거실에서 마주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늘 시선의 각도를 오도쯤 옆으로 틀었다. 나를 정면으로 보는 순간 무언가가 확정된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확정되면 안 되는 어떤 사실이. 동생 이루하. 조건: 알 수 없음. 이게 문제였다. 다른 셋은 대충 패턴이 읽혔다. 방임, 형식, 회피. 흔한 것들이었다. 세 사람 모두 나를 어떻게 대할지 정해놓고, 그 틀 안에서만 움직였다. 그런데 이루하는 읽히지 않았다. 웃음의 밀도가 너무 일정했다.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웃음의 각도가 변하지 않았고, 즐거운 상황에서도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훈련된 것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표정을 관리한다는 건, 그 나이대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형, 오늘 담임선생님이 형 얘기 하시더라." 등굣길, 이루하가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밝은 목소리였다. 가방끈을 양손으로 잡고 몸을 살짝 흔들며 걷는 걸음걸이도 딱 그 나이대 아이답게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이 지나치게 완벽하다는 거였다. "뭐라고." "별거 아니야. 그냥 걱정하시는 거지. 형이 다시 이상한 짓 할까봐." "이상한 짓이 뭔데." "몰라,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근데 애들 사이에서 말이 좀 많았잖아. 형이 예전에." 그가 말끝을 흐렸다. 정보를 정확히 주지 않으면서, 뭔가 나쁜 일이 있었다는 인상만 남기는 방식이었다. 아주 정교한 방식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이런 걸 할 수 있나. 나는 옆에서 그의 옆얼굴을 봤다.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근데 형 요즘 좀 달라진 것 같아. 좋게."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좋게, 라는 말이 걸렸다. 좋게 달라졌다는 건, 원래는 나빴다는 전제를 다시 심는 말이었다. 그는 문장 하나로 과거를 만들고, 현재를 비교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까지 심어놓았다. 세 가지 작업을 한 문장 안에서 끝냈다. "뭐가 좋게 달라졌는데." "음... 예전엔 좀 무서웠거든. 형이."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앞을 보며 웃었다. 대답을 회수해버리는 방식이었다.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답하지 않는다. 나는 그 기술이 낯설지 않았다. 전생의 궁정에서도 똑같은 화법을 쓰는 자들이 있었다. 대개 그들은 오래 살았다. 학교에 도착하자 강민재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은 아니었다. 그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이노아, 잠깐 얘기 좀 할까." 그가 나를 화단 쪽으로 데려갔다.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화단에는 시든 국화가 몇 송이 남아 있었고, 그 위로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있었다. "어제 체육 시간에 좀 힘들어 보이더라. 괜찮아?" "괜찮아." "그래, 다행이네." 그는 잠깐 나를 살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상태를 점검하듯이. "근데 솔직히 말해줄까? 애들이 너 좀 무서워해. 예전 일 때문에." "예전 일이 뭔데." 그가 잠깐 멈칫했다. 그 멈칫이 답이었다. 그도 정확히는 몰랐다. 그냥 소문을 들었고, 그 소문을 사실로 취급하고 있었다. 소문의 출처를 모르면서 그 소문의 무게는 정확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건... 아무튼. 나는 그냥 너 도와주려는 거야. 문제 안 만들게." "내가 문제를 만드는 거야, 아니면 문제가 있는 걸로 취급되는 거야." 그가 다시 멈칫했다. 이번엔 좀 더 길게. "...둘 다 아니야. 그냥, 조심하라는 거지." 도와준다는 말 뒤에 항상 통제가 따라붙었다. 나는 그걸 알아챘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은 에너지를 쓰는 일이고, 이 학교에서 나는 에너지를 아껴야 했다. "고맙다." 짧게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뒤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감시. 이 아이는 스스로를 관리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계산에 넣지 않으니까. 수업 시간,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서윤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반이었는데,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다. 그녀는 책을 두 권 안고 있었고,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나를 보는 순간, 그 걸음이 아주 짧게 흐트러졌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시선을 피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복도 끝까지 그 속도를 유지했다. 형, 누나야. 누나는 착해.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확신 없는 어조였다. 착하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의심하는 목소리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설득당한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처럼. 착한데 왜 도망가.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다가 거울 속 내 얼굴을 잠깐 봤다. 이노아의 얼굴이었다. 열네 살 짜리의 얼굴. 이 얼굴로 이 집안의 지형을 다 파악하는 데 겨우 이틀 걸렸다. 전생의 궁정을 파악하는 데는 삼 년이 걸렸다. 이번이 더 빠른 건, 상대의 규모가 작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때보다 더 잘 보고 있어서였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시험해봤다. "아버지, 저 학교에서 좀 힘든 일이 있었어요." 조용해졌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릇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딱. "또 무슨 일 벌였냐." "제가 벌인 게 아니라, 저를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소문이 이유 없이 도냐." 그 한 마디로 끝이었다. 재판도 없고 변론도 없었다. 판결은 이미 나 있었고, 나는 그저 그걸 통보받은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떴다. 국그릇에서 국물이 넘칠 듯 말 듯한 높이까지 채워졌다가, 다시 조금 덜어냈다. 그 손동작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정확한 계량을 하듯이. 이루하는 조용히 밥을 먹으며 나를 힐끔 봤다. 그 눈빛에 아주 잠깐, 만족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걸 봤다. 확실히 봤다. 눈동자가 아니라 입가의 근육 하나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백 분의 일 초짜리 반응이었다. 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저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그래." 밥을 반도 안 먹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식탁에서 배를 채우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 집의 구조가 명확해졌다. 아버지는 판단하지 않고 정죄한다. 어머니는 개입하지 않고 방관한다. 누나는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리고 동생은, 이 모든 침묵과 방관을 설계한다. 전생의 궁정과 다를 게 없었다. 그때도 나는 억울함을 말했다. 그때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누군가는 조용히 판을 짜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왕비였고, 지금은 이 자리에 열두 살짜리 아이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방식은 그대로였다. 반복이다. 세계가 바뀌어도 사람은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그때 방 안 온도가 조금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보일러도 돌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 벽에서 다시 그 소리가 났다. 스ㅡ륵. 돌아봤다. 벽에 아무것도 없었다. 벽지의 무늬도 그대로였고, 균열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몸 안 어딘가에서 뭔가가 팽창하듯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 전생에서 소환 계약을 맺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설마. 나는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몸의 심장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박동이, 평소와 다른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끊어진 줄 알았던 계약이,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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