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6세 몸으로 버티기로 했다

4화

강도현은 담을 넘어 정원을 빠져나왔다. 소녀의 몸으로 담을 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팔 힘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근육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얇은 뼈만 만져졌다. 손끝이 담벼락 이끼에 미끄러졌다. 쿵. 무릎이 벽돌에 부딪혔다. 통증이 짧고 날카롭게 올라왔다가 이내 무뎌졌다. 다시 팔을 뻗었다. 손톱 밑에 흙이 박혔다. 두 번 미끄러졌다가 겨우 담벼락을 짚고 올라섰다. 담 너머로 몸을 던지듯 넘었다. 쿵. 바닥에 닿는 순간 골반뼈가 시큰하게 울렸다.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이 얕고 빨랐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 담은 한 손으로 짚고 뛰어넘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동네 어귀 편의점 유리창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섰다. 낯선 소녀의 얼굴이었다. 검은 눈, 마른 뺨,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그 얼굴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지어봐도 낯설었다. 입꼬리를 올려도, 눈을 찡그려도, 유리 안의 얼굴은 여전히 남의 것 같았다. '적응할 시간이 없다.' 그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우선 자기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익숙한 숫자를 익숙한 손가락으로 눌렀다. 손가락은 예전보다 짧고 가늘었다. 그래도 비밀번호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류음이 울렸다. 번호가 바뀐 게 아니었다. 지문 인식이 되지 않았다. 【 등록된 생체정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 "당연하지." 그는 낮게 내뱉었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가늘고 높은 소녀의 음성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한 번 더 눌러봤다. 결과는 같았다. 문 앞에 서서 잠시 이마를 문 손잡이에 대었다. 차가운 금속의 온도가 이마를 식혔다. 집 문 앞에 붙은 우편함을 뒤졌다. 손끝에 종이 몇 장이 걸렸다. 광고지, 관리비 고지서, 그리고 마지막 한 장. 고지서 한 장을 꺼냈다. 수신인 이름은 여전히 '강도현'이었다.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 이름은 종이 위에 또렷하게 박혀 있었지만, 이제 자신을 증명해 주지 않았다. 이름은 있는데 그 이름의 몸이 없었다. 주민센터에 가서 신분증을 재발급받으려 해도, 지문도 얼굴도 다 바뀌어 있었다. 사진 속의 오십이 년 인생과, 지금 이 몸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서류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려 근처 은행 자동화 기기로 걸었다. 밤공기가 소녀의 몸에는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어깨를 움츠렸다. 카드가 없었다. 지갑을 뒤집어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도 얼굴 인증에서 튕겨 나왔다. 【 본인 확인 실패. 】 기기 화면에 뜬 문장을 보며 강도현은 손을 벽에 짚었다. 숨이 가빴다. 갈비뼈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한 번 더 시도했다. 결과는 같았다. 세 번째 시도에서 기기는 아예 화면을 꺼버렸다. 【 과다 인증 실패로 이용이 제한되었습니다. 】 "씨발." 짧게 내뱉은 욕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돈도 없다. 신분도 없다. 그러면서 90일 안에 신원을 증명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조건을 다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남은 날짜만 눈앞에 떠 있을 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소녀의 몸은 대사가 빠른 건지 배고픔이 유난히 빨리 왔다. 위장이 안쪽에서부터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 지갑에 남은 건 동전 몇 개뿐이었다. 원래 오십이 년 인생의 재산은 통장 안에, 부동산 등기부에, 회원 코드 안에 있었다. 지금 그 모든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숫자로만 존재하던 재산이, 이 몸에는 단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숨만 짧게 밖으로 밀려 나왔다. 【 알림: 게이트 파편에서 회수된 잔여 마나석이 인벤토리에 저장되었습니다. 】 【 게이트넷 마켓에서 환금 가능합니다. 】 강도현의 눈앞에 처음 보는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반투명한 판, 그 위에 아이콘들이 떠 있었다. 작은 돌 모양 아이콘 하나가 깜빡였다. 손가락을 뻗어 아이콘을 눌러보았다. 숫자와 등급이 표시된 창이 펼쳐졌다. "게이트넷?"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검색해 보니 답이 나왔다. 던전에서 얻은 자원을 거래하고, 던전 클리어 영상을 공유하는 플랫폼이었다. 사용자 수, 거래량, 후원 순위 같은 통계가 화면에 줄줄이 떴다. 배포자로 등록하면 시청자들이 후원금을 보낼 수 있었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음성 변조, 마스크 착용, 심지어 아바타로 등장하는 배포자들의 사례도 있었다. '신분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군.' 화면을 넘기며 몇몇 인기 배포자의 수익을 확인했다. 숫자가 컸다. 그만큼 위험도 컸다. 하지만 위험은 명확했다. 영상이 퍼지면 얼굴이, 목소리가, 습관이 남는다. 누군가 알아볼 수도 있었다. 싸우는 방식, 걸음걸이, 무기를 쥐는 손의 각도. 그런 것들은 감추기 힘든 흔적이었다. 90일 안에 신원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정체를 드러내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굶는 것보다 나은 선택은 없었다. '팔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팔면 누군가에게 걸린다.' 두 갈래 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았다. 【 안 팔면 결제일에 죽는다. 】 시스템이 그렇게 말하듯 남은 시간 카운터가 눈앞에 떠 있었다. 남은 시간: 89일 23시간. 숫자가 초 단위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 흐름을 보고 있으니 손끝이 저려왔다. 강도현은 편의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섰다. 형광등 불빛이 창백하게 얼굴을 비췄다. 거울에 비친 소녀의 얼굴을 봤다. 검은 머리카락, 마른 어깨, 겁먹은 눈빛. 하지만 눈빛 안쪽엔 예전 그대로의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 시선만은 오십이 년을 살아온 사람의 것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얼굴에 몇 번 물을 끼얹었다. 물기를 닦고 다시 거울을 봤다. 여전히 낯선 얼굴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편의점에서 산 검은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코와 입을 가리자 숨소리가 마스크 안쪽에서 되돌아왔다. 낡은 후드도 하나 걸쳤다. 후드를 눌러쓰자 시야가 좁아졌다. 남은 동전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위장이었다. 거울 속의 형체는 이제 소녀도, 강도현도 아니었다. 그저 마스크와 후드를 쓴 그림자 하나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날 밤, 그는 낡은 스마트폰 하나를 주워 게이트넷 앱을 켰다. 액정에 금이 가 있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가 떴다. 그래도 앱은 켜졌다. 계정을 만드는 데 신분증이 필요 없었다. 닉네임만 있으면 됐다. 빈칸에 커서가 깜빡였다. '묵귀.' 예전 코드네임을 그대로 썼다. 어차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 이름을 쓰는 순간, 예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아주 잠깐 겹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 배포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 【 첫 방송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강도현은 마스크 위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숨이 마스크 안쪽에서 뜨겁게 뭉쳐졌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버튼을 누르면, 되돌릴 수 없었다. 누르지 않으면, 굶는다. '이게 다야?' 짧은 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손가락 끝이 화면에 닿을 듯 말 듯 떠 있었다. 그때, 뒤편 골목 어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발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질질 끄는 소리와 절뚝이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어깨에 낫처럼 휘어진 뼈를 짊어진 형체들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강도현은 스마트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후드 아래로 시선을 좁혀 골목 안쪽을 노려보았다.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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