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6세 몸으로 버티기로 했다

3화

사령왕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쾅! 마당의 나무 세 그루가 통째로 부러졌다. 뿌리째 뽑힌 흙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강도현은 몸을 던져 담벼락 뒤로 굴렀다. 귀가 먹먹했다. 등뼈가 벽돌 모서리에 부딪혔다. '씨발, 세게 쳤네.'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사령왕의 그림자가 담벼락 위로 넘어왔다. 거대한 갈비뼈가 달빛을 가렸다. 【 스킬 '전술 판단'이 발동됩니다. 】 【 상대 개체의 공격 패턴을 분석합니다. 】 눈앞에 반투명한 선이 떠올랐다. 사령왕의 다음 동작이 붉은 궤적으로 미리 그려졌다. 강도현은 그 선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왼쪽으로 두 걸음. 다시 오른쪽으로 한 걸음. 뼈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옷자락이 찢어졌다. 바람이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도 몸에는 닿지 않았다. '맞았으면 끝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오십이 년 된 몸이 한계를 알리고 있었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남은 스태미나 12%. 】 숫자를 보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이게 마지막이다.' 사령왕이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위이이잉. 붉은 궤적이 또 한 번 눈앞에 그려졌다. 강도현은 그 선을 읽었다. 발목. 안쪽. 뼈와 뼈 사이 좁은 틈. 붉은 표시가 유난히 짙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다.' 강도현은 부러진 갈퀴 자루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과 피가 섞여 미끄러웠다. 자루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낮게 몸을 던졌다. 지면을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무릎이 흙바닥에 긁혔다. 살갗이 찢어지는 감각이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서걱- 자루 끝이 정확히 그 틈을 뚫었다. 키에에에엑. 사령왕이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몸이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땅이 흔들렸다. 강도현은 그대로 반동을 이용해 몸을 튕겨 올렸다.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은 없었다. 그냥 팔을 뻗었다. 부러진 자루가 사령왕의 눈구멍 하나를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푸확. 초록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강도현의 얼굴을 스쳤다. 뜨거웠다. 사령왕의 몸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에서 검은 재가 흘러나왔다. 【 던전 최심층 봉인 개체 '사령왕'을 처치했습니다. 】 정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도현은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후들거렸다. 살았다는 감각보다 먼저 온몸의 통증이 밀려왔다. 갈비뼈 근처가 욱신거렸다. 아까 부딪힌 등뼈도 여전히 아팠다. '끝났다.' 혓바닥에 피 맛이 돌았다. 그는 그것도 삼켰다. 살았으면 됐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갈라지던 사령왕의 몸 한가운데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쇳소리 같은,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시간을... 빼앗겠다..." 초록빛이 강도현을 향해 뻗어왔다. 피할 새도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저주 '시간의 몰수'가 발동됩니다. 】 빛이 몸을 관통했다. 강도현은 뼈마디 하나하나가 뒤틀리는 감각을 느꼈다. 턱이 아파왔다. 관절이 안에서부터 재조립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짧아지는 게 보였다. 피부가 팽창하고 수축했다. 키가 줄어들었다. 셔츠 소매가 팔뚝을 지나 손등까지 흘러내렸다. 【 대상의 신원 정보 52년치를 회수합니다. 】 【 신분·자산·경력 데이터가 소거됩니다. 】 【 신체 연령이 재조정됩니다. 】 "이게 무슨-" 말이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낮고 거친 소리가 아니라 얇고 갈라지는 소리였다. 자기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도현은 자기 목을 붙잡았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손톱이 짧고 깨끗했다. 손등에 있던 흉터, 삼십 년 넘게 지녀온 그 흉터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매끈한 살갗만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을 폈다 접었다 해봤다. 낯설었다. 자기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옷이 몸에서 헐렁하게 흘러내렸다. 바짓단이 발목을 넘어 흙바닥에 끌렸다. 허리춤을 붙잡고서야 겨우 옷이 벗겨지지 않았다. 정원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이 있었다. 아까 나무가 부러지면서 창문 하나가 함께 깨진 모양이었다. 그 조각에 비친 얼굴을 봤다. 열여섯쯤 소녀의 얼굴이었다. 눈매는 낯설었지만 눈동자 색은 그대로였다. 그것만이 그가 강도현이라는 유일한 증거처럼 보였다. "...뭐야, 이게."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다시 내뱉었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다. 【 알림: 현재 신체 상태로는 기존 신원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 90일 이내 신원 증명 완료 시 정상 데이터가 복구됩니다. 】 【 90일 이내 미완료 시, 대상은 완전 소멸 처리됩니다. 】 강도현은 유리 조각을 쥔 손을 떨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유리 조각 끝이 손바닥을 살짝 그었다. 피가 한 줄 배어 나왔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통증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90일." 그가 중얼거렸다.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웃음이 먼저 터졌다. "내가 지금... 열여섯짜리 몸으로, 90일 안에 뭘 증명하라고?" 대답은 없었다. 알림창도 더 이상 뜨지 않았다. 정원엔 재가 된 몬스터들의 잔해와, 부러진 나무와, 낡은 갈퀴 자루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소녀의 몸으로 무릎을 꿇은 강도현이 있었다. 그는 자기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지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다시 봐야 할 것 같았다. 평생 써온 몸이 통째로 사라졌다. 오십이 년의 흔적이 사라졌다. 남은 건 낯선 얼굴과 낯선 목소리, 그리고 숫자뿐이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지금 이 몰골로 경찰을 만나면 끝장이라는 걸. 신분증도 없다. 지갑도 사라졌다. 아니, 지갑을 가지고 있던 사람 자체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경찰이 물을 것이다. 이름이 뭐냐고. 사는 곳이 어디냐고. 보호자는 누구냐고. 강도현은 유리 조각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서 흐르던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사이렌 소리가 골목 어귀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여야 한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린 몸은 어른의 다리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의 감각이 완전히 달랐다. 발끝에 힘을 주는 것조차 새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강도현은 담벼락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손바닥이 떨렸다. 그때, 골목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었다. 그는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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