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고블린 열댓 마리가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숫자를 세다가 그만뒀다.
열이든 열다섯이든, 어차피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박정호와 청주 조원들은 뒤로 슬쩍 물러섰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발을 맞춰서.
"선봉이 알아서 정리해."
박정호의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남 일이라는 투였다.
아니, 남 일이 아니라 원래부터 자기 일이 아니었다는 투였다.
주변 조원 몇 명이 실실 웃었다.
저 웃음의 의미를 모를 만큼 내가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저 새끼가 알아서 죽겠지'라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검을 뽑았다.
짧게 숨을 고르고 앞으로 나섰다.
발밑의 흙이 부드럽게 파였다.
습기를 머금은 숲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그 냄새 사이로, 놈들 특유의 비릿한 악취가 섞여 들어왔다.
첫 놈이 달려들었다.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콰직!
놈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튕겨나갔다.
내장이 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뒤이어 두 놈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왼쪽 놈은 발로 밀어내고, 오른쪽 놈은 검으로 목을 갈랐다.
서걱!
피가 튀었다.
숨이 가빠졌다.
세 번째 놈이 곤봉을 들고 달려들었다.
피할 시간이 없었다.
몸을 옆으로 비틀며 검을 역방향으로 찔러 넣었다.
퍽!
곤봉이 허공을 갈랐고, 놈의 목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숫자를 세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냥 눈앞의 것을 베고, 찌르고, 밀어내는 것만이 유일한 사고 과정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조원들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장난삼아 놀리던 톤이 슬쩍 가라앉았다.
"저거... 진짜 세네."
"고등학생 맞아?"
"저 정도면 B급이 아니라 A급도 노려볼 만한 거 아니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평가하는 듯한, 재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관찰당하는 톰슨가젤이 된 기분이었다.
다만 이번엔 내가 가젤이 아니라, 사자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사냥을 하는 쪽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박정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표정만 살짝 굳어 있었다.
저 표정이 인정인지, 아니면 짜증인지 구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였을 거다.
마지막 놈까지 처리하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혼자서 열댓 마리를 상대했으니 당연했다.
검을 쥔 손목이 저릿저릿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수고했다."
박정호가 툭 던지듯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대한 것도 아니었으니 실망할 이유도 없었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 한지연 팀장님이 물병을 건넸다.
물병이 손끝에 닿는 순간에야 목이 얼마나 말랐는지 깨달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익숙해요."
"익숙한 게 문제야."
팀장님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익숙해진다는 게 왜 문제일까.
익숙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더 위험한 거 아닌가.
그런데도 팀장님의 말투에는 걱정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 걱정의 무게를 그때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날 밤, 캠프 공용 천막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서준 탐색자님이시죠?"
고개를 돌렸다.
숨이 멎었다.
검은 단발머리.
방송에서 본 그 얼굴.
화면 속에서만 보던 그 눈매, 그 목소리, 그 미소.
노노냥이 실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네... 네! 맞아요!"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고블린 열댓 마리를 상대할 때보다 심박수가 더 빠른 것 같았다.
"방금 정찰 나가셨던 거 봤어요. 대단하시더라고요."
"아, 아니에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말도 안 되는 겸손이었지만 머리가 마비되어 다른 말이 안 나왔다.
방금까지 검을 휘두르던 손이, 지금은 밥그릇도 제대로 못 들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노노냥이 웃었다.
방송에서 보던 그 미소 그대로였다.
아니, 실물은 화면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쳤다.
"제 방송 보세요?"
"네! 매일 봐요!"
너무 빠르게 대답해서 스스로도 놀랐다.
속으로 '아, 이서준 이 인간아, 이건 좀 과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가버린 뒤였다.
"우와, 팬이시네요."
"...네, 팬입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불판 위 고기보다 내 얼굴이 더 뜨거울 지경이었다.
한지연 팀장님이 옆에서 실실 웃고 있었다.
"서준이가 노노냥 씨 광팬이에요."
"팀장님!"
노노냥이 재밌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정말요? 감사해요."
감사하다는 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심장이 벌렁거린다는 표현이 이렇게 문자 그대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저는 사실 이번 작전에 응원 방송 콘텐츠로 왔어요. 협회 협조 요청이 있어서요."
방송용 참가였구나.
실전 전투는 안 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안심이 됐다.
왜 안심이 됐는지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저도 C랭크라서 전투는 못하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정도예요."
"괜찮아요. 그냥 옆에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말하다가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너무 팬심이 폭주했나.
방금 한 말이 스스로 듣기에도 오글거려서, 밥그릇에 코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노냥은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귀여운 팬이시네요."
귀엽다는 말에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누가 나한테 귀엽다는 말을 언제 해줬던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저 사실 좀 걱정되는 게 있는데요."
노노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방송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뭐가요?"
"아까 편성표 봤는데, 서준님 혼자 세 개 조에 배정됐던데... 그거 너무 무리 아니에요?"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방송에서 보던 배신자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카메라 앞에서는 얄밉게 사람 뒤통수를 치던 캐릭터였는데.
지금은 그냥, 평범하게 남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저도 좀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제가 관리자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시청자 수가 좀 있어서 압박이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나서준다는 게, 이렇게 낯설고 이렇게 따뜻한 감각이었나.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아니에요, 서준님이 무리하면 안 되잖아요."
순수한 걱정이 느껴졌다.
방송에서의 냉철한 배신자 이미지와, 지금 이 여린 표정이 겹쳐졌다.
실제로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방송 콘텐츠를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와, 지금 눈앞의 사람 사이에 이렇게 큰 간극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간극을 알게 된 게 왠지 특별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한지연 팀장님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이 잘 통하네."
"팀장님!"
또 부끄러워서 소리를 질렀다.
노노냥은 그런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날 밤은, 강제로 끌려온 작전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노노냥과 이야기를 나누고, 팀장님이 옆에서 챙겨주고.
박정호의 텃세도, 세 개 조 지원이라는 부담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 노노냥은 방송 뒷이야기를 몇 개 풀어놓았다.
편집 전 원본이 얼마나 다른지, 시청자들이 상상하는 캐릭터와 실제 성격이 얼마나 다른지.
듣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웃음소리가 천막 안에 가득 퍼졌다.
식사가 끝날 무렵, 노노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촬영 팀한테 가볼게요. 다음에 또 얘기해요, 서준님."
"네! 감사합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노노냥이 또 한 번 웃었다.
텐트로 돌아가는 길, 팀장님이 나란히 걸었다.
밤공기가 살짝 서늘했다.
낮의 열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온데간데없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네, 조금은요."
"근데 서준아."
"네?"
팀장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그 낮아진 톤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까 관리자한테 물어봤는데, 세 개 조 지원 건. 그거 그냥 오늘 하루만이 아니래."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데워져 있던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작전 기간 내내 그렇게 배정됐다는 거야. 널 아예 인력 부족 지부들 대타로 쓸 생각인가 봐."
숨이 턱 막혔다.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마치 누가 밀어버린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전체 기간이요? 며칠짜리 작전인데요?"
"...보름."
보름.
혼자서, 세 개 조를, 보름 동안.
머릿속이 하얘졌다.
계산을 해보려고 했지만 숫자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하루에 몇 번의 전투를, 며칠 동안, 몇 명의 몫으로.
"팀장님,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나도 알아. 근데 서류는 이미 결재됐어."
결재됐다는 말이 못처럼 박혔다.
서류라는 게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본부에서 왜 이런 배정을..."
팀장님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뭔가 말하려다 삼키는 표정이었다.
말과 침묵 사이에서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팀장님, 뭔가 아시는 거 있죠."
...
팀장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노냥과의 대화로 따뜻했던 가슴이, 지금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분명 팀장님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뭔지, 나에게 말해주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보름이라는 숫자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