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주문 대신 순간이동이라니

5화

청람학원 기숙사 4층, 좁고 삭막한 복도를 걸으며 본좌는 생각했다.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전장(戰場)*이 될 곳이라. *전장: 싸움이 벌어지는 곳. 문패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고 방문을 열려던 찰나, 옆방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어, 새로 온 애가 여기야?" 문을 열자 서 있던 것은 키가 크고 인상이 선한 남학생이었다. 어깨가 넓고 손이 큼직한 것이, 무가(武家)의 자제라 해도 믿을 법한 체격이었느니라. "김정우다. 옆방 살아." "이도현이라 하오." "...말투가 좀 특이하네." 정우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본좌는 순간 당황하였으나, 그 웃음에 악의가 없음을 곧 알아차렸다. "뭐가 그리 우습소." "아니 그냥, 사극 찍는 줄 알았어. 너 혹시 연극부야?" "연극부라니. 본좌는 그저 본좌의 언어로 말할 뿐이오." "본좌? 야, 그거 뭔데." "...본인을 이르는 말이오." "와, 진짜 신기하다. 재밌는 애네. 잘 지내보자."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본좌의 방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짐 별로 없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나 완전 붙임성 좋거든." 의외로 편안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본좌는 처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기분이었느니라. 지구라는 낯선 세계, 청람학원이라는 낯선 문파(門派)*에서 이런 호의를 만날 줄은 몰랐다. *문파: 무예나 학문을 가르치는 집단. "고맙소. 김 소협의 마음 씀씀이, 본좌 잊지 않으리다." "소협은 또 뭐야... 됐다, 그냥 알아들을게." ***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자 소란이 벌어졌다. 한 남학생이 본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무슨 급한 전서(傳書)*라도 나른 사람처럼 다급했다. *전서: 급히 전하는 소식. "야, 너 그거 진짜야? 전입시험에서 감지기 터졌다는 게?" "...누구시오." "박태양! 2학년 A반! 그 얘기 학원에 다 퍼졌어, 완전 전설이야!" 태양은 눈을 반짝이며 본좌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그 힘이 제법 세어 본좌는 속으로 신음하였다. "진짜 무영창 전이 됐다며? 나 그거 보고 싶어서 여기 왔다니까!" "...본좌는 그저 시험을 본 것뿐이오." "그게 전설이라니까! 야, 여기 다들 봐, 이 사람이 그 사람이야!" 교실 안의 학생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본좌를 쳐다보았다. 수십 개의 시선이 본좌를 향해 꽂히니, 그 압박이 실로 만만치 않았느니라. 마치 무림맹* 시험장 한복판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무림맹: 여기서는 학원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저게 그 감지기 터진 애야?" "와, 실제로 보네." "근데 왜 저렇게 말투가 이상해?"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본좌는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창가에 조용히 앉아 있던 또 다른 남학생이 본좌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경 너머 눈빛이 유독 날카로웠다. 그 존재감이 실로 예사롭지 않았으니, 본좌는 그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느니라. "윤도훈." 그가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도현이오." "...주문 시전, 한 번도 안 하네." 순간 본좌의 심장이 덜컥했다. "...무슨 말이오." "수업 시간 내내 지켜봤는데, 넌 마법 도구도 안 쓰고 주문도 안 외웠어. 근데 시험은 통과했지. 이상하지 않아?" 예리한 관찰이었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로다. 마치 고수(高手)*가 상대의 허점을 단번에 짚어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고수: 무예가 뛰어난 사람. "...본좌는 그저 남들과 다른 방식을 쓸 뿐이오." "그 방식이 뭔지 궁금한데." 도훈의 눈빛에서 의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는 안경을 슬쩍 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통 사람은 마력 회로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근데 넌 아예 회로를 켜지도 않았어. 그런데 결과는 통과였지. 나는 그게 궁금한 거야." "...호기심이 많은 자로군." "호기심이 아니라 관찰이야. 나는 그냥 본 대로 말하는 것뿐이니까." 첫날부터 정체가 흔들릴 위기에 놓인 것이었느니라. 본좌는 속으로 진땀을 삼키며, 겉으로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참으로 눈치 빠른 자로다. 이자를 방심해서는 아니 되리라.' *** 그날 오후, 본좌는 학원장 명의로 온 호출장을 받았다. 두꺼운 종이에 금박으로 새겨진 문양이, 지구의 공문서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했다. 향한 곳은 학원 밖 고급 저택이었다. 저택은 웅장했다. 정원에는 이름 모를 화초들이 가득했고,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만 해도 본좌가 살던 문파의 훈련장만큼이나 넓었다. 이것이야말로 재벌이라는 것의 위세인가, 하고 본좌는 속으로 감탄하였다. "정재열입니다." 40대 초중반의 남자가 응접실에서 본좌를 맞았다. 값비싼 정장을 걸치고 있었으나, 눈빛에는 감추기 힘든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가 내미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도현이라 하오." "서은하 씨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제 딸들을... 부탁드립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재벌가의 사위라는 위세와는 달리, 그 태도는 실로 절박했느니라. 마치 문파의 존망이 걸린 일을 부탁하는 것처럼. "딸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최근에 사라진 학생이 세 명입니다. 다들 고마력 보유자였어요. 제 딸들도... 마력 수치가 높습니다." 정재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응접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경비 인력을 늘렸는데도 소용이 없더군요. 학원 측에서도 조사 중이라지만...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하 씨한테 부탁했습니다."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 저 호위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요." 서연이었다. 교복 차림의 그녀는 강렬한 눈빛으로 본좌를 훑어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검신(劍身)*을 겨누듯 날카로웠느니라. *검신: 칼의 몸체. "이서연이오?" "그래서요. 뭐, 나 지켜준다고?" "...그렇게 임무를 받았소." "필요 없어." 서연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강해요. 누구 호위 받고 다니는 것, 딱 질색이거든." "서연아—" "아빠는 가만히 있어요." 정재열이 입을 다물었다. 딸 앞에서 그의 권위는 실로 무력해 보였느니라. 마치 강호(江湖)의 절대 고수 앞에 선 하급 무사처럼. "그럼 동생분은." "설윤이는... 아직 어려서 잘 몰라요. 근데 나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고요."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본좌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고집스러운 계집이로다. 하나 그 눈빛 속에 숨은 두려움을 본좌는 놓치지 않았노라. 겁에 질린 것을 감추려 더욱 사나운 척하는 것이니라.' 정재열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괜찮소. 임무는 정식으로 수락하겠소." "감사합니다, 정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본좌는 그의 눈빛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읽었다. 안도와 함께 스치는, 아주 짧은 초조함이었다. 마치 감춘 패를 들킬까 두려워하는 도박꾼의 낯빛과도 같았다. '이 자,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이라. 딸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진심이나, 그 뒤에 또 다른 계산이 있는 듯하도다.' 본좌는 그 의심을 가슴 한구석에 눌러 담고,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저택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 학원 정문 앞에서 낯익은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설채연?"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 눈빛에는 반가움과 함께, 감출 수 없는 불안이 뒤섞여 있었느니라.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 본좌가 기억하는 그대로였으되, 그 표정만큼은 예전과 사뭇 달랐다. "오랜만이네, 도현아." 짧은 인사였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옷깃을 살짝 그러쥐고 있는 것을, 본좌는 놓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인가. 그것도 이런 표정으로.' 본좌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그 의문에 답을 얻기도 전에, 설채연의 다음 말이 본좌의 발걸음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재회가 앞으로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본좌는 아직 알지 못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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