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했더니 국가급 재난이라니

1화

강도윤은 헤드셋을 고쳐 쓰며 숨을 골랐다. 모니터에는 붉은 글자로 경고창이 떠 있었다. 3분 초과. 콜 시간 초과 경고였다. 팀장이 등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강도윤은 개의치 않았다. 옆자리 상담원은 벌써 다음 콜을 받고 있었다. 대본대로 읽는 속도가 기계 같았다. 안내, 확인, 종료. 정확히 90초. 그게 정답이라고 회사는 말했다. 강도윤은 그 정답을 따르지 않았다. "고객님, 정말 힘드셨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흐느낌이 들렸다. 카드값 연체 안내 전화였다. 원래 대본에는 연체료와 신용등급 하락 경고가 적혀 있었다. 강도윤은 그 대본을 읽지 않았다. "그동안 혼자 버티셨네요. 아무도 몰라줬죠."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제가 뭐 해드릴 수 있는 건 크지 않지만요. 그래도 일단 오늘은, 한숨 돌리셔도 될 것 같아요." 전화 저편에서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작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상담원분이 처음이시네요, 이런 말 해주시는 분." "저만 그런 건 아닐 텐데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통화가 끝난 뒤 고객은 만족도 조사에 별 다섯 개를 남겼다. 회사 규정 위반 3건이 동시에 적립되었다. 팀장의 모니터에 경고 알림이 세 번 울렸다. 동료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불렀다. 회사를 배신하고 고객 편만 든다는 뜻이었다. 실적은 바닥이었다. 콜당 처리 시간, 해지 방어율, 교차 판매율 — 어느 지표에서도 강도윤은 하위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대며 전화를 요청하는 고객이 매달 늘었다. 팀장은 그를 자르지도, 승진시키지도 못했다. 실적표와 고객 요청 명단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도윤씨." 팀장이 그의 자리로 다가와 낮게 말했다. "이번 달도 위반 건수가 제일 많아요." "알고 있습니다." "근데 지명 요청도 제일 많고." 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쉬고 돌아갔다. 그런 대화가 벌써 몇 달째 반복되고 있었다. 그날도 야근이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사무실에는 강도윤 혼자였다. 다른 상담원들은 여섯 시 정각에 맞춰 퇴근했다. 강도윤은 밀린 콜백 목록을 처리하느라 자리를 지켰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다. 자판기 커피는 식어서 쓴맛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콜이 걸려 들어왔다. 발신자 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시스템에서는 무번호 착신이 걸릴 수 없었다. 강도윤은 헤드셋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들리세요?" 대신 소리가 들렸다. 웅— 낮고 두꺼운 진동음이었다. 헤드셋 안에서가 아니라 두개골 안쪽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강도윤은 헤드셋을 벗었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귓속이 아니라 뼈 속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강도윤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통증은 없었다. 그저 그 진동만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형광등이 완전히 꺼졌다. 강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전인가 싶어 창밖을 보려 했다. 하지만 창문 위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 사무실 전체의 형태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번졌다. 흰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빛이었다. 강도윤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빛이 보였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었다. 발밑이 사라졌다. 떨어지는 감각도, 떠오르는 감각도 아니었다. 그냥 무게가 없어졌다. 강도윤은 팔을 뻗어 뭔가를 붙잡으려 했다. 잡히는 것이 없었다. 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강도윤은 돌바닥 위에 엎드려 있었다. 돌 냄새. 오래된 향 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가 지나치게 많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낯선 향이 코를 찔렀다. 밀랍 냄새, 마른 꽃 냄새, 그리고 그 아래 깔린 흙냄새까지. 강도윤이 평소 맡아본 어떤 냄새와도 달랐다. 눈을 떴다. 둥근 천장이 보였다. 채색된 유리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붉은 빛과 푸른 빛이 바닥에 얼룩처럼 번졌다. 성당인가, 신전인가 싶었다. 주위를 둘러싼 발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여자들이었다.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갑옷을 입은 사람, 로브를 걸친 사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까지 뒤섞여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강도윤은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떨렸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바닥에 짚은 손바닥에서 돌의 냉기가 그대로 올라왔다. 강도윤은 그 냉기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신을 줬으니까. 누군가 외쳤다. "소환이 성공했다!" 다른 목소리가 이었다. "이번엔 진짜 사람이야!" 세 번째 목소리가 겹쳤다. "저번처럼 짐승이 아니라?" "봐, 두 다리로 서잖아!" 웅성거림이 커졌다. 강도윤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한국어가 아니었는데도 뜻이 그대로 머릿속에 박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입술의 움직임과 들리는 소리가 어긋나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로브를 입은 노년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는 지팡이 대신 낡은 책을 들고 있었다. 표지는 가죽이었고, 오랜 세월 손에 쥐어진 흔적으로 반질반질했다.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강도윤은 대답 대신 주변을 살폈다. 다들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눈물이 그친 지 얼마 안 된 눈도 있었다. 손을 떨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갑옷 입은 여자 하나는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언제든 뽑을 수 있다는 자세였다. 그런데도 그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을 든 손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았다. 강도윤은 그 부조화를 놓치지 않았다. 평소 습관대로 입을 열었다. "많이들 놀라셨겠어요." 순간 공기가 멈췄다.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났으니까요. 무서우셨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침착하게 대처하고 계시네요. 대단하시네요." 노년의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지팡이 대신 든 책을 놓칠 뻔했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완전히 멎었다.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웅— 다시 그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강도윤의 머릿속이 아니었다. 신전 전체가 진동했다. 채색 유리창이 잠깐 흔들렸다. 벽에 걸린 등불이 일제히 밝아졌다. 촛대 위 불꽃들이 동시에 커졌다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뒤쪽에 서 있던 갑옷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뭐, 뭐지……." 그녀는 자신의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당황했다. 검을 쥔 손이 풀려 바닥에 닿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몇몇은 숨을 몰아쉬었다.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벽에 등을 붙였다. 그녀의 어깨가 조용히 떨렸다. 강도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늘 하던 말을 했을 뿐이었다. "저, 저기……." 강도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신전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들은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경계가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노년의 여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그 말…… 다시 한번 해주시겠습니까." 강도윤은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대단하다고." "그게 왜요." 노년의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신전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에 쥔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강도윤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순간적으로 물결처럼 흔들렸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신전 안의 여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강도윤은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정반대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강도윤은 몰랐다. 그 순간 왕성 마법기사단의 통신 결정석 수백 개가 동시에 빛을 뿜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결정석과 연결된 수십만 개의 소형 수신구가, 도시 곳곳의 여성들 손 안에서, 똑같이 진동했다는 사실을. 거리를 걷던 여자들이 걸음을 멈췄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이 손에 쥔 저울을 놓쳤다.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여자 경비병이 창을 떨어뜨렸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울렸다. 사람은 믿는 만큼만 본다. 그날 밤, 왕성의 감시탑에서는 아무도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탑의 관측사들은 결정석의 진동 기록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오차가 아니었다. 도시 전역, 거의 모든 여성 인구의 수신구가 동시에 반응한 흔적이었다. 이런 규모의 공명은 전례가 없었다.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 관측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소환 때문일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신전의 불빛만이 유난히 밝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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