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했더니 연금술사라니

5화

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명함이 조합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금속 문양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반사했다. 나는 그걸 몇 번이고 집었다가 내려놨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필요하다는 말. 그 말을 곱씹을수록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천장을 보고 누웠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지직. 낡은 안정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를 세면서 잠을 청해보려 했다. 하나, 둘, 셋. 소용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결정체를 주웠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결정체. 그걸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온도, 무게, 냄새까지 생생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쟤 뭐 됐대?" "연금술사래." "아, 그거 완전 잉여 직업 아니야?" "각성했는데 그거야? 진짜 아깝다." 그때 그 목소리들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비웃음도 아니고 그냥 무관심. 오히려 그게 더 아팠다. 누군가 나를 미워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미움은 최소한 관심이니까. 나는 그날 이후로 스스로를 방 안에 가뒀다. 남들이 나를 필요 없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필요 없어져버리기로 한 것처럼. 조합대 앞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적어도 안전했다. 십 년. 십 년을 그렇게 살았다. 조합대와 나, 딱 그 정도의 관계만 유지하면서. 가끔 온라인 마켓에 물건을 올리고, 택배로 거래하고, 얼굴 한 번 안 보고 돈을 받는 삶. 그게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 그 방 안까지 걸어 들어와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팔백 명 규모의 길드가. 나는 다시 명함을 집어 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문양을 비춰봤다. 용의 발톱 같기도 하고, 날개 같기도 한 문양. 지옥룡 길드. 이름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결국 연락처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끊겼다. "결정하셨어요?" 강하린의 목소리는 어제와 똑같이 담담했다. 마치 내가 전화할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 "조건이 있어요." "말해봐요." "길드 소속은 안 해요. 이건 어디까지나 개별 계약이에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몇 초의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좋아요." 너무 쉽게 승낙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뭔가 더 밀당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드라마에서 보던 계약 장면이랑 너무 달랐다. "그럼... 재료는요? 상급 촉매 재료는 등급 인증이 필요한데, 저는 그런 인증 받은 적이 없어서." "길드 창고 전체를 열어줄게요. 필요한 건 다 가져다 써요." "창고 전체요?"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거 아무나한테 막 여는 거 아니지 않아요?" "당신은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용의 숨결에 안 녹는 병은요." "그건..." 그녀가 잠시 말을 골랐다. 수화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아직 답을 몰라요. 그래서 당신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나는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두려움과 흥분이 동시에 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 마치 처음 결정체를 손에 쥐었을 때처럼.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만나서 얘기해요. 내일 정오, 길드 본부로 오세요." "저... 본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주소 문자로 보낼게요." 전화가 끊겼다. 뚜―.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조합대를 바라봤다. 삼백 병. 숫자가 다시 머릿속을 짓눌렀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보다 다른 감정이 더 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낯설어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 다음 날, 나는 처음으로 원룸 밖에서 강하린을 다시 만났다. 길드 본부 로비였다. 천장이 높았다. 높아도 너무 높았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야 꼭대기가 보였다. 사람들이 오갔다. 대부분 각성자였다. 인식표를 흘긋 보는 것만으로도 등급이 갈렸다. C급, B급, 드물게 A급까지. 반짝이는 인식표를 목에 건 사람들이 무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내 인식표를 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비전투, 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스쳐 지나가는 시선.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런데도 몸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강하린이 로비 중앙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늘도 그 정장 차림이었다. 어제 봤던 것과 다른 색이었지만,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 "왔네요." "...네." "긴장 안 해도 돼요. 여기 다들 바빠서 아무도 신경 안 써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몇몇 시선이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었다. 특히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나를 향해. 길드 마스터 옆에 비전투 등급 인식표를 단 여자. 그림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며 그녀가 말했다. "위층에 브리핑 룸이 있어요. 던전 정보 공유하고, 필요한 물량 확정할 거예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는 이미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 지팡이를 든 사람, 그리고 등에 커다란 검을 멘 사람. 모두 나를 한 번씩 흘긋 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뒀다. 땀 냄새와 금속 냄새가 뒤섞인 공기. 좁은 공간 안에서 숨쉬기가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는 벽에 붙은 안내판을 봤다. 1층 로비, 5층 훈련장, 12층 작전실, 20층 연구소. 건물이 몇 층까지 있는지 짐작도 안 됐다. 숫자가 계속 늘어났다. 25, 30, 35. 이게 다 뭐 하는 층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우리 길드, 지금 등록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요?" 강하린이 갑자기 물었다.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우리 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모르겠어요." "팔백이 넘어요." 숫자가 실감이 안 났다. 내 작업실 하나 채우기도 버거운 물량을, 팔백 명 규모의 길드가 소모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매일 소모되는 포션, 스크롤, 물약의 양을 상상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중에 실전 투입 가능한 인원은요?" "삼백이요." 삼백. 공교롭게도 내가 만들어야 할 병의 숫자와 같았다. 우연이겠지만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브리핑 룸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홀로그램 지도가 떠 있었다. 공기부터 달랐다. 서늘하고, 뭔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공기. 던전 내부 구조로 추정되는 형상, 그 위로 붉은 표시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깜빡, 깜빡.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이게 우리가 가진 정보 전부예요." 강하린이 지도를 가리켰다. "입구부터 삼십 미터까지밖에 정찰이 안 됐어요." 지도 위의 검은 공백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알 수 없는 영역, 알 수 없는 위협.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몰라요. 다만 확실한 건, 이 던전 이름이에요." 그녀가 지도 하단에 적힌 텍스트를 확대했다. 지옥룡의 둥지. "저희 길드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에요. 오 년 전 첫 도전에서 창립 멤버 절반을 잃었어요." 나는 그 순간 숨이 막혔다. 창립 멤버 절반. 그 말이 무슨 무게인지 짐작조차 안 됐다.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죽음, 그 뒤에 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상상됐다. "어떻게... 그런데도 다시 가려는 거예요?" 내 질문에 강하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날 죽은 사람 중에 제 사수가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오 년 동안 준비했어요. 병력도, 장비도, 전략도. 이제 마지막으로 필요한 게 당신이 만들 물약이에요." "이번엔 이겨야 해요." 강하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냥 절박함.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그 말이 다시 한 번 내 안에 파고들었다. 필요하다는 말. 십 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말. 그 말이 이렇게 무겁고, 이렇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건지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순간, 이 일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게 감당 못 할 무게라는 것도 함께 느꼈다. 홀로그램 지도 위, 붉은 표시가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마치 무언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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