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제가 지킬게요

4화

윤소은은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말수가 줄었고,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군가는 그런 소은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소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신경 쓸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겸이 억울하게 무너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뒤에 누군가 있다는 확신. 소은은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하수아의 반 앞을 지나갔다. 지나가는 척, 아무 관심 없는 척하며 문 앞에 서서 대화를 엿들었다. 대부분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급식 메뉴, 다음 시험,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소문. 하지만 소은은 그 틈에서 나겸의 이름이 나오길 기다렸다. “걔 진짜 이상했잖아. 갑자기 그런 짓을 하고.” “몰라, 원래 좀 불안정했던 거 아니야?” 소은의 손끝이 꽉 쥐어졌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직은. 우기환의 SNS 계정도 뒤졌다. 게시물 하나하나, 댓글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살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지나치게 깨끗했다. 마치 누군가 미리 정리해둔 것처럼. '너무 깨끗한 게 오히려 이상해.' 소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로 숨길 게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사건 당일의 목격자를 찾는 일도 계속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어보고 다녔다. “그날 나겸이 무슨 일 있었는지 봤어?” “어? 나 그때 없었는데.” “난 잘 몰라. 그냥 소문만 들었지.”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잘 모른다, 관심 없다. 몇몇은 소은이 나겸의 편을 든다는 사실만으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시선 속에는 경계와 불편함이 섞여 있었다. “너 걔랑 친해? 아니면 왜 그렇게 물어보고 다녀.” 소은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며칠이 흘렀다.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만 쌓여갔다. 하지만 소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나겸의 얼굴이, 그날의 표정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은은 학교 컴퓨터실에 들어갔다. 방과 후, 텅 빈 교실은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만이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고, 낡은 본체들이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과제 때문에 들어간 거였다. 별생각 없이 자리에 앉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옆자리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우기환의 자리였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아직 로그아웃되지 않은 메신저 창이 그대로 떠 있었다. 소은은 순간 숨을 삼켰다.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우기환은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가방은 의자에 걸려 있었고, 화면은 여전히 밝았다. '봐도 될까.' 머릿속에서 갈등이 스쳤다. 하지만 손은 이미 마우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 속 대화는 우기환과 다른 반 학생 사이의 것이었다. 소은의 눈이 빠르게 문장을 훑었다. [야 그거 진짜 잘 먹혔다 ㅋㅋ] [문자 조작한 거 다 서준이가 몰라서 그렇지] [나겸이 번호 알아내는 거 개꿀이었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동안 헤매던 조각들이 한순간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조작... 문자를 조작했다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향해 겨눴다. 찰칵. 조용한 컴퓨터실에 소리가 울렸다. 소은은 숨을 멈췄다. 다행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몇 초 후, 한 번 더. 찰칵. 이번엔 화면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대화의 전체 흐름이 보이도록 찍었다. 손이 떨려 사진이 흔들릴까 걱정됐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복도를 지나 컴퓨터실 문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 우기환이 돌아오고 있었다. 소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원래 있던 창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앉아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문이 열렸다. 우기환은 별다른 의심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힐끗 소은 쪽을 봤지만, 별 관심 없다는 듯 이내 시선을 돌렸다. 소은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애써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소은은 조용히 짐을 챙겨 컴퓨터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아직도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소은은 복도를 걸으며 방금 찍은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화면을 확대해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읽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증거야.' 확신이 몸 전체를 관통했다. 나겸은 정말 억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만든 사람은 우기환이었다. 가슴 한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다른 한쪽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분노와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나겸을 믿었던 게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을 만든 대가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 그때, 창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소은은 걸음을 멈추고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운동장에서 서준이 농구공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 하수아와 이봄, 추가영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환호하고 있었다. “오빠 진짜 잘한다!” 이봄의 목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만큼 컸다. 서준은 그 말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은의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선배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서준의 표정 어디에도 죄책감이나 불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밝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다만 확실한 건, 서준의 그 무지함, 혹은 무관심이 나겸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사실이었다. 소은은 다시 화면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대화 내용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문자 조작... 번호를 알아냈다는 것도... 이거 하나로는.' 한 장의 대화 캡처만으로는 부족했다. 우기환이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도 아직 특정하지 못했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소은은 직감하고 있었다. 만약 우기환이 눈치를 챈다면, 자신에게도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상대는 이미 한 사람의 인생을 조작할 만큼 치밀했다. 자신이 가진 증거 한 장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소은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소은의 머릿속에 두 얼굴이 떠올랐다. 나겸의 유일한 친구라는 강태식과 고윤재. '그 두 사람이라면...' 두 사람은 나겸을 끝까지 믿어준 유일한 존재였다. 소은이 아는 한, 그들만큼 이 일에 진심인 사람은 없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그들뿐이었다. 결심이 선 순간, 소은의 발걸음은 이미 2학년 교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소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손안의 휴대폰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안에 담긴 몇 줄의 대화가, 어쩌면 모든 걸 바꿔놓을 열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열쇠를 쥔 손이 얼마나 위태로운 위치에 서 있는지도, 소은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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