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폭 검사, 이세계서 터지다

4화

이건우는 검을 쥔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방금 위계 판정에서 '검사'라는 이름을 받고 나름 뿌듯했었다. 검도 8년, 학교 검도부 주장까지 했던 자신에게 딱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이제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뒤덮였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그가 이제껏 봐온 어떤 영화나 게임 컷신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검사 위계, 검기 발현 스킬. 방금 저 중년 남자가 쓴 능력에 비하면 자신의 스킬은 유치원생 물총 같았다. 아니, 물총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웠다. 물총은 최소한 물이 나가긴 하니까. "저 아저씨... 방금 뭐 한 거야." 박서연이 옆에서 속삭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손톱이 이건우의 팔뚝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붙잡고 있었는데, 정작 박서연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몰라. 근데... 저건 그냥 사람이 아니야." 이건우가 대답했다. 검도 유단자로서 살면서 여러 종류의 무력을 봤지만, 사람 몸 안쪽에서 뭔가가 터지는 걸 이렇게 눈으로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열두 번을, 거의 동시에. 검도 시합에서 아무리 긴장되는 순간에도 이 정도 충격은 없었다. 박서연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토할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열두 명이... 순식간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숫자를 세는 것조차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건우도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헷갈렸다. 그 정도로 순간이 짧았다. 신전 안엔 이제 병사들의 잔해와 시신만이 남아 있었다. 대리석 바닥은 붉게 물들었고, 그 한가운데 강태호라는 남자가 두 아이를 감싸안 듯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그 남자의 등이 넓어 보였다. 아니, 등이 넓다기보다는— 저 사람 앞에 있으면 뭔가 안전할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근거는 하나도 없는 확신이었지만, 방금 열두 명을 순식간에 처리한 사람에게 안전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었다는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이건우는 그 광경을 보며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몰려오는 걸 느꼈다. 하나는 순수한 공포였다. 저 남자를 적으로 두는 순간 자신들 모두가 방금 죽은 병사들과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공포. 목이 그냥 뎅강 잘리는 게 아니라, 몸 안쪽에서 뭔가가 터져서 죽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죽음의 방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이었다. 이 잔혹한 세계에서, 저런 압도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자신들과 같은 학생들, 그것도 방치되어 죽어가던 아이들 쪽에 섰다는 것. 만약 저 힘이 반대편에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신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자신들일 수도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다시 떨렸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우리... 저 아저씨 편에 서야 하는 거 아니야?" 박서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저 신관들이 저 아저씨를 반란자로 취급하잖아. 우리도 같이 위험해질 수도..." 이건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멀리서 몸을 떨고 있는 김도윤과, 방금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듯한 이수아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 두 사람은 이미 저 남자의 편에 선 것처럼 보였다. 아니, 편을 선택한 게 아니라 목숨을 건졌으니 어쩔 수 없이 그 곁에 있는 거겠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좀 더 지켜봐야 했다. 지금 함부로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였다. * 나는 신전 바닥에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 열두 명을 순식간에 터뜨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났다. 손이 떨렸다. 검사 시절 사형 구형을 할 때도 이렇게 떨진 않았다. 그때는 최소한 법이라는 방패가 있었다. 지금은 방패 없이 그냥 내 손으로 사람을 열둘이나 죽인 거다. 법 이전에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뒤늦게 밀려오려는데, 이상하게도 그 죄책감보다 더 크게 밀려오는 건 안도감이었다. 저 아이들이 살았다는 안도감. [마태복음 5: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예수님 말씀치고는 너무 과격한데, 지금 상황엔 딱 맞는 것 같다. 사실 저 구절 뒤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이어지긴 하는데, 지금 이 순간 저 병사들을 사랑할 여유는 없었다. 신학적으로는 감점 요인이겠지만, 실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괜, 괜찮으세요...?" 이수아라는 여학생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넘어온 애가 남 걱정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으면서, 목소리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였다. "내 걱정보다 네 걱정을 해라." 대답이 좀 퉁명스럽게 나왔다. 원래 존댓말 쓰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이 애들한텐 자꾸 반말이 튀어나왔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얘들이 내 아들이랑 비슷한 나이라서 그런 걸지도. 김도윤이라는 남학생은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움켜쥔 채였다. "저희... 왜 도와주신 거예요." 목소리가 너무 낮아 겨우 들릴 정도였다. "다들 저희를 그냥 버려두고 갔는데..." 나는 대답 대신 신전 천장을 잠시 올려다봤다. 높은 천장에 이 세계 식으로 그려진 벽화가 있었는데, 아마 신을 형상화한 그림 같았다. 날개가 여섯 개쯤 달린 존재가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그림. 성경에 나오는 스랍의 이미지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딱히 이유는 없다." 결국 그렇게 말했다. "그냥 눈앞에서 죽어가는 애를 못 본 척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그건 사실이었다. 7년 전, 아내가 죽어가는 걸 병원에서 지켜봤을 때, 아무도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 의사도, 나도, 하나님도. 그때 나는 매일 밤 성경을 읽으며 기적을 구했지만, 기적은 오지 않았다. 작년, 아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봤을 때도 똑같았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법정에서는 그렇게 위엄있게 판결문을 읽던 내가,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순간엔 아무 권한도 없었다. 이번엔, 뭐라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게 다였다. 복잡한 정의감이나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다. 신관이 상처를 억지로 지혈하며 다가왔다. 표정이 이제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방금까지 나를 심문하듯 쳐다보던 그 위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당신... 어떻게..." "질문은 나중에." 내가 말을 잘랐다. "이 애들 치료할 방법 있어?" 신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수아 쪽을 가리켰다. "그... 저 아이의 위계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확실히 공손해져 있었다. 사람 열둘 죽이니까 존댓말이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도 결국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손을 뻗어 이수아의 위에 다시 문양을 그렸다. 빛이 반짝이며 글자가 떠올랐다. [이수아. 위계: 죽음을 피한 자. 스킬: 줄기세포 재생.] "재생 스킬이라니, 아이러니하네." 내가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애가 재생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늘의 유머 감각이 참 고약하다. 사람을 다 굶겨 죽여놓고 그제야 재생 스킬을 주는 게, 마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라고 망치 던져주는 격이었다. 이수아가 손을 뻗어 자신의 상처에 갖다 댔다. 희미한 빛이 손끝에서 번지며, 그동안 앙상했던 몸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갈라진 피부가 서서히 아물고, 뺨에도 옅은 홍조가 돌았다. "이, 이게..." 본인도 놀란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몸이 스스로 회복되는 걸 눈으로 보는 기분이 어떨지,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김도윤 쪽도 확인했다. [김도윤. 위계: 죽음을 피한 자. 스킬: 존속.] 존속이라는 단어가 좀 애매했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했는데, 그냥 '버틴다'는 의미의 스킬 같았다. 전투 스킬로는 형편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죽지 않고 버티는 것만큼 절실한 능력도 없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스킬은 화려한 검기나 불덩이가 아니라, 그냥 살아남는 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보다 더 확실한 재산은 없으니까. 신관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눈빛에 두려움과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의 위계는... 이 왕국에 매우 위협적입니다." 그 말투에서 뭔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금 나는 병사 열둘을 순식간에 죽였다. 이 왕국 입장에선 내가 반란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반란군은 그래도 협상이 되는 상대다. 나는 뭐가 되는지도 모르는 미지수였다. "위협적이면 어쩔 건데." 내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일부러 힘을 뺐다. 겁먹은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속으로는 이 신전 어딘가에 또 다른 병력이 대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신관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등을 돌려 신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부자연스럽게 빨랐다. 도망친다기보단, 서둘러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가는 걸음걸이였다. 뭔가 보고를 하러 가는 것 같았다. 윗선에. 그 윗선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나는 아직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다만 신전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나팔 소리 같은 것이, 이제 이 사태가 신전 안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예고하고 있었다. 이건우와 박서연이 저 멀리서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 애들도, 이수아도, 김도윤도, 이제 나와 같은 배를 탄 셈이었다. 문제는 이 배가 얼마나 큰 폭풍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