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병사들이 점점 좁혀왔다.
창끝이 반원을 그리며 나를 둘러싸는 형태로 다가왔다.
숫자를 세어보니 대략 열둘 정도였다.
혼자 상대하기엔 너무 많고, 도망치기엔 등 뒤에 아이 둘이 걸려 있었다.
신전 바닥은 여전히 서늘했다.
대리석에 새겨진 금빛 문양들이 등불 빛을 받아 은근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이었다.
마치 결혼식장 대여했는데 갑자기 조폭들이 몰려온 느낌이랄까.
비유가 좀 이상한가.
근데 지금 내 머릿속이 정상은 아니니까 이해해주길 바란다.
"소환되지 않은 자는 즉시 항복하라."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말투가 딱 파업 진압 경찰 같았다.
다만 방패 대신 저쪽은 칼을 들고 있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그것도 그냥 칼이 아니라 날이 반짝반짝하게 갈려 있는, 딱 봐도 실전용 칼이었다.
저런 걸로 한 번 스치면 그냥 훅 간다.
"항복하면 어떻게 되는데?"
내가 되물었다.
병사는 대답 없이 창을 겨눴다.
대답이 없다는 게 곧 대답이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로 항복 받아주는 폭력조직은 없다.
이세계라고 다를 리 없지.
병사들의 대열이 조금씩 더 좁아졌다.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훈련받은 군인들 특유의,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보폭.
7년 전에 봤던 특수기동대의 그것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아니, 사람 죽이는 훈련은 어느 세계나 다 비슷하게 굴러가는 건가.
등 뒤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두 아이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여학생의 얼굴이 유독 창백했다.
피부가 종이처럼 얇았고, 손목엔 오래된 병상 링거 자국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학생 쪽은 몸 곳곳에 오래된 멍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누런 것도 있고 푸르스름한 것도 있고, 딱 봐도 최근 것과 오래된 것이 겹쳐 있는 상태였다.
한눈에 봐도 이세계 오기 전부터 정상적인 삶을 살진 못한 티가 났다.
가정폭력,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
검사질 20년 하면서 저런 흔적은 수백 번도 더 봤다.
법정에서 서류로 볼 때는 그냥 숫자와 사진이었는데, 지금은 내 등 뒤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애들이다.
갑자기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분노라고 해야 할지, 짜증이라고 해야 할지.
[누가복음 4:18,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전파가 아니라 방어벽이었다.
아니 방어벽도 소용없다.
지금 필요한 건 저 열둘을 어떻게든 처리할 방법이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검사 시절엔 증거 배치를 계산했고, 그 후엔 폭발물 배치를 계산했다.
지금은 둘 다 필요했다.
누가 먼저 움직일지, 어느 방향에서 창이 들어올지, 아이들을 등 뒤에 두고 몇 초를 벌 수 있을지.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내질렀다.
촤악!
첫 창이 내 옆구리를 스쳤다.
피가 튀었다.
뜨거운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프다는 감각을 인지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검사 생활 20년 동안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놈이 결국 이긴다는 거였다.
법정에서도 그랬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끝까지 침착한 놈이 이긴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피 웅덩이에 등불 빛이 반사돼서 묘하게 반짝였다.
이 와중에도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확실히 나도 어딘가 좀 고장 난 인간이다.
"미안한데."
낮게 중얼거렸다.
"나 오늘 진짜 죽을 생각이었거든."
그 말에 병사들이 잠시 멈칫했다.
무슨 소린가 싶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저쪽 세계에서 온 놈이 갑자기 뭘 죽고 싶었다는 소리를 하니까.
하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오늘 죽으려고 스위치까지 눌렀던 남자에게, 병사 열둘 정도는 그렇게 대단한 위협도 아니었다.
이미 죽음 앞에서 한 번 마음을 다 접어버린 놈한테, 창 몇 자루가 뭐 그렇게 무섭겠나.
"그러니까 니들도 오늘 죽자."
말을 뱉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느껴졌다.
손끝에서 이상한 열감이 올라왔다.
부여받은 스킬 창이 시야 한구석에 조용히 떠 있었다.
[스킬: 폭산(爆散)]
[대상 지정 후 발동 시, 대상 내부에서 폭발 반응을 일으킵니다]
[경고: 미숙련 발동 시 예측 불가능한 범위 확장 가능]
경고문이 떠 있는데도 나는 웃음이 났다.
그러네, 미숙련이니 뭐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7년 전엔 이 폭발물을 만들면서 매뉴얼을 스스로 짰었다.
페이지마다 안전 수칙을 적어놓고, 몇 번을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지금은 그 매뉴얼조차 없다.
그냥 감으로 하는 거다.
무모하다는 건 나도 안다.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서 안전 수칙 따질 여유가 어디 있나.
"태호... 아저씨..."
등 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학생이 눈을 뜬 모양이었다.
"도망치세요... 저희 때문에..."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이 어린애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남 걱정을 하고 있다.
자기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근데 지금 감동에 취할 시간은 없었다.
"닥치고 눈 감아."
반말로 대꾸했다.
존댓말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매너 챙길 때가 아니라 살 방법 찾을 때다.
남학생도 어렴풋이 눈을 떴는지, 뭐라고 중얼거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대상은 딱히 정하지 않았다.
그냥 눈앞의 병사 무리 전체를 마음속으로 겨눴다.
정밀하게 조준할 여유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냥 저기, 나를 죽이려는 저 무리 전체를 향해.
딸깍.
7년 전 그 스위치와 똑같은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7년 전에도 이런 감각 뒤에 사람이 죽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다.
쾅! 쾅! 쾅쾅쾅!!!
연쇄 폭발이었다.
병사들의 몸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터져나갔다.
마치 몸속에 폭탄을 하나씩 삼킨 것처럼, 갑옷 이음새 틈으로 붉은 것들이 뿜어져 나왔다.
비명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못했다.
반응할 틈도 없이 즉사한 병사들의 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촤아아악!
피와 살점이 신전 바닥을 뒤덮었다.
대리석 위에 새겨진 금빛 문양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예술작품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잘못 뿌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값비싼 미술관 바닥에 누가 페인트통을 던진 것처럼, 성스러워야 할 신전이 순식간에 도축장으로 변해버렸다.
투두둑, 투둑.
찢긴 갑옷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의 손목 하나가 내 발 앞까지 굴러왔다.
나는 그걸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7년 전에도 이런 걸 여러 번 봤으니까.
익숙해진다는 게 참 무섭다.
[열두 명의 개체가 소멸했습니다]
[해당 스킬은 '금기 위계'로 재분류됩니다]
금기 위계라니, 뭔 유튜브 알고리즘 제재 등급 같은 이름이다.
'이 콘텐츠는 커뮤니티 가이드라인을 위반하여 제한됩니다' 이런 느낌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당장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신전 전체가 얼어붙었다.
남아있던 신관도, 학생들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 숨 한 번 크게 들이켜는 소리조차 크게 울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방금까지 창을 들고 다가오던 놈들이 순식간에 붉은 얼룩이 되어버렸으니, 저들 입장에서도 정신이 나갔을 만하다.
멀리서 누군가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아까 그 신관인 듯했다.
이해한다.
나도 지금 속이 뒤집힐 것 같으니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아이를 살폈다.
여학생, 이수아라는 이름표를 단 아이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가슴이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남학생, 김도윤이라는 이름표를 단 아이는 겨우 눈을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좀 이상했다.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구분이 잘 안 됐다.
하긴, 사람이 한순간에 열둘이나 터져나가는 걸 봤으니 정상적인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괜찮아, 죽지 않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몸도 여기저기 피투성이였다.
옆구리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옷을 다 적셨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아드레날린이 빠지면서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 진짜 아프네.
이거 병원 가면 최소 몇 바늘이다.
근데 여긴 병원이 없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가 겨우 다시 버텼다.
쓰러지면 안 된다.
지금 쓰러지면 이 애들을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순간, 멀리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전 반대편, 다른 학생들 무리 속에서 이건우와 박서연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방금 벌어진 일을 목격한 게 분명했다.
이건우의 눈은 크게 벌어져 있었고, 박서연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둘 다 뭔가를 삼키려는 것처럼 목이 움직이고 있었다.
멀어서 정확히는 안 보였지만, 저 표정이 단순한 공포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몰랐다.
저 두 학생의 눈에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새겨졌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