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병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신전 안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는 촛불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향냄새가 코를 찌를 듯 진해졌는데, 그게 하필 죽음을 예감케 하는 냄새처럼 느껴졌다.
"물러서세요, 격리 절차에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력을 행사합니다."
갑옷 입은 병사 하나가 창끝을 내 목에 겨눴다.
창끝 흔들리는 걸 보니 저 병사도 겁먹은 게 분명했다.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오히려 마음이 좀 놓였다.
저쪽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럼 나는 뭐, 태연했냐고?
웃기지도 않지, 속으로는 오줌 지릴 뻔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 같은데, 겉으로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밖으로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7년간 재판장에서 배운 게 딱 이거였다—
표정으로 지면 그날 사건 다 진다.
피고인이든 검사든, 법정 안에서 얼굴 근육이 먼저 무너지는 쪽이 진다.
여긴 법정도 아니고 재판관도 없지만, 그 원칙만은 왜인지 여기서도 통할 것 같았다.
"협조 안 하면 뭘 어쩌실 건데."
일부러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배에 힘을 꽉 줬다.
신관이 눈을 부라렸다.
"강제 소각 조치도 가능합니다."
소각이라니, 인간을 뭐 쓰레기 분리수거 하듯 말한다.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 취급이잖아, 이거.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악!!!"
신전 반대편에서 비명이 터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내 목에 겨눠져 있던 창끝조차 순간 흔들리며 방향을 잃었다.
청호고 게임덕후 무리 여섯 명 중 하나, 정민재라는 이름표를 단 남학생이 신관 하나의 목에 단검을 꽂아넣고 있었다.
"이 세계에선 내가 먼치킨이야! 니들이 뭘 알아!"
소리치는 말투에서 뭔가 익숙한 향기가 났다.
서브컬처 웹소설 좀 본 사람이면 다 아는 그 대사였다.
아마 저 애 머릿속엔 지금 이 순간 배경음악까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방금 자기 위계가 '견습 대장장이'로 판정 났다는 이유로 저지른 짓이었다.
대장장이면 어때서, 살아만 있으면 되는데.
근데 저 나이엔 그게 죽음보다 못한 모욕으로 느껴지나 보다.
자기 인생 전체가 서브컬처 세계관 안에 들어왔다고 착각하는 순간, 대장장이라는 직업은 곧 '조연 확정' 선고처럼 들렸을 거다.
촤악!
피가 튀었다.
신관이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쓰러지는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의 금빛 문양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민재 일행 다섯 명은 순간 얼어붙었다가, 그중 하나가 소리쳤다.
"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죽이고 튀자!"
튀자니, 어디로.
여긴 대한민국 골목이 아니라 이세계 신전인데.
지도도 없고 스마트폰 지도앱도 안 터지는 곳에서 '튀자'는 계획을 세운다는 게, 나로서는 감동적일 정도로 무모했다.
차라리 배달앱으로 탈출로를 주문하는 게 빠르겠다.
[열왕기하 2:24, 곰 두 마리가 나와서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 선지자님, 지금 저기 곰 대신 병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만.
곰이든 병사든 결과는 비슷할 것 같아서, 그게 더 무서웠다.
신관의 절규가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저 반란자들을... 처, 처단하라!"
병사들의 창끝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방금까지 나를 겨누던 창들이, 정민재 일행을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만큼은, 창끝의 방향이 바뀐 것에 안도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나도 결국 사람이니까.
촤르르르륵!
갑옷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병사 여덟 명 정도가 그들을 포위했다.
정민재 일행 여섯 명은 겨우 단검 하나, 부엌칼 하나 든 상태로 맨몸이나 다름없었다.
누구 하나는 아예 무기도 없이 뒷걸음질만 쳤다.
"자, 잠깐만요, 저희는 그냥..."
한 명이 손을 들며 물러섰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촥! 촥촥!
칼날이 살을 가르는 소리.
비명이 신전 전체를 채웠다.
바닥을 긋는 발소리, 갑옷이 부딪는 쇳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 찢어지는 신음.
주변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다리가 굳어버렸을 테니까.
숨소리마저 죽인 채, 다들 자기 차례가 아니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 순간 얼어붙었다.
검사 생활 20년을 하면서 시신은 수백 번 봤다.
부검실에서도, 현장에서도, 사진 속에서도 늘 이미 끝난 결과물로서의 죽음만 마주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건, 다른 종류의 무게였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소리, 눈에서 초점이 빠져나가는 그 짧은 틈.
그건 서류로도, 사진으로도 절대 옮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 그만해!!"
누군가 외쳤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여섯 명 모두가 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대리석 위에 강처럼 흘러 금빛 문양을 뒤덮었다.
방금까지 위계를 놓고 낄낄대던 아이들이, 이제는 그 문양 위에 붉은 얼룩으로 남았다.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그 조용함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이 자들은 반란을 시도한 자들입니다."
신관이 목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겨우 일어섰다.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나긋했다.
방금 사람 여섯이 죽었는데, 저 어조는 도무지 변하지 않았다.
마치 회의 중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태연했다.
"위계가 마음에 안 든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의 결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학생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방금까지 게임 캐릭터 빌드 짜듯이 위계를 즐기던 애들이, 이제는 그 위계가 생사를 가르는 도구라는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고, 누군가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와중에 시선을 돌렸다.
신전 구석, 사람들의 발밑에 밀려나 있는 두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다들 방금 그 학살을 보느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자리였다.
대리석 기둥 그늘 아래, 시선이 안 닿는 사각지대였다.
여학생 하나와 남학생 하나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거의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떨고 있었다.
둘 다 교복이 이미 흙과 핏자국으로 엉망이었고, 손끝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기, 아직 안 죽었는데요..."
내 말에 신관이 시선을 그쪽으로 던졌다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거두었다.
"어차피 위계 판정에서 도태될 개체들입니다. 방치하십시오."
도태.
그 단어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뭔가 뇌 안쪽에서 스위치가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7년 전 그 법정에서, 판사가 '집행유예'를 선고했을 때와 똑같은 감각.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의 목숨이 서류 한 줄, 단어 하나로 갈리는 걸 봤다.
그날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편 82: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웃기게도 지금 이 순간 성경 구절이 제일 논리적으로 다가왔다.
신을 믿진 않지만, 저 문장 하나는 지금 이 신전 안 누구보다 정직하게 들렸다.
나는 천천히 그 둘 쪽으로 걸어갔다.
발밑에서 미끌, 핏물이 신발 밑창에 밟히는 감촉이 느껴졌다.
병사들이 나를 힐끗 쳐다봤지만, 아직 나에 대한 '격리 절차'는 후순위로 밀린 모양이었다.
무릎을 꿇고 두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한 명은 소름 돋을 정도로 야위었고, 다른 한 명은 숨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얕았다.
손목을 짚어보니 맥박이 위태로울 정도로 느렸다.
방금까지 살육을 목격한 아이들답게, 둘 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동공이 풀린 채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왔어."
대체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7년, 20년 동안 법정과 수사실에서 배운 냉정함 따위는, 이 순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뒤에서 창끝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 몇 명이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격리 대상이 명령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격리 대상이라니, 사람 대우 참 야박하다.
하지만 이번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손끝이 저릿저릿 저려오는 게 느껴졌다.
방금 부여받은 그 스킬, '폭산'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써본 적 없는 능력이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지금 쓰지 않으면 이 두 아이가 죽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저릿함이 점점 손목까지 퍼지면서, 뭔가가 몸 안에서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