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통로는 어둡고 좁았다. 발밑에서 물이 스며 나왔다.
벽을 이룬 돌은 오래전부터 습기를 먹은 듯 검게 얼룩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밑창이 축축한 바닥에 닿아 작은 소리를 냈다. 첨벙. 첨벙. 그 소리마저 좁은 통로 안에서는 크게 울렸다.
하늬가 앞장서서 걸으며 귀를 세웠다. 그녀의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발끝으로 먼저 바닥을 짚고, 소리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체중을 옮겼다.
"검 소리예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소리."
숨소리는 거칠고 불규칙했다. 오래 달린 사람의 것 같았다. 아니, 오래 버틴 사람의 것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좁은 석실 안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검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갑옷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썹까지 번져 있었다. 뺨에도 긁힌 상처가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의 앞에는 몬스터 몇 마리가 남아 있었다. 검은 형체들이 벽을 긁으며 움직였다. 발톱이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뒤편에는 최강혁 파티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저 서서, 청년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윤아, 정신 차리고!"
최강혁의 목소리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체력 아직 남았잖아. 마무리해."
청년, 한도윤은 대답 없이 몬스터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동작에 미세한 흐트러짐이 있었지만, 위력만큼은 상당했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몬스터 한 마리의 몸통이 그대로 갈라졌다.
서은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 레벨이 얼마나 되는 거지."
그녀의 눈은 한도윤의 검이 아니라, 그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보고 있었다. 상처의 깊이, 절단면의 모양. 마법사인 그녀에게는 그것이 익숙한 판단 기준이었다.
김판수는 청년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발의 각도와 검을 회수하는 속도를 살폈다.
"...레벨10입니다."
"어떻게 알아요?"
강여진이 물었다.
"검을 휘두르는 궤적을 보면 압니다."
김판수는 손끝으로 허공에 짧은 선을 그렸다.
"저 정도 속도로 궤적을 그리면서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 건, 근력이 아니라 숙련도입니다. 몸에 새겨진 움직임이에요.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닙니다."
강여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벨10 검술사가 신입이라고요?"
"신입일 겁니다."
김판수의 목소리는 낮았다.
"저런 방식으로 사람을 부리는 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놓은 겁니다. 파티가 앞서 나가고, 한 사람이 뒤에서 전부 처리하고. 저건 배분이 아닙니다. 소모입니다."
지민이 뒤에서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웠다.
한도윤이 두 번째 몬스터를 베어냈다. 팔이 흔들렸다. 검을 다시 들어 올리는 속도가 조금 전보다 느려져 있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어."
서은하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아무도 돕지 않는 거죠?"
그 물음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강혁 파티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도 검을 뽑지 않았다.
한도윤이 마지막 몬스터를 베어내고 무릎을 꿇었다. 숨이 거칠었다. 검 끝이 바닥에 닿아 짧은 쇳소리를 냈다.
최강혁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끝이 갑옷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잘했어. 이번엔 진짜 빠르게 처리했네."
지민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도윤 씨 덕분에 우리가 편하네요."
그 말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한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최강혁 파티가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한도윤이 뒤늦게 몸을 일으켜 따라나섰다. 일어서는 동작이 느렸다. 무릎에 한 번 손을 짚고서야 겨우 균형을 잡았다.
지나가는 길에, 그의 시선이 김판수 쪽을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다.
한도윤의 눈에 무언가 스쳤다. 부러움 같기도 하고, 절박함 같기도 한 그런 것. 그 시선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판수는 그 눈빛을 그냥 받아들였다.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한도윤의 걸음걸이를 한 번 더 훑었을 뿐이었다. 오른쪽 다리를 아주 살짝 끄는 걸음. 무릎이 아니라 발목 쪽 부상이었다.
두 파티는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한도윤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강여진이 낮게 말했다.
"저거, 딱 봐도 착취잖아요."
"맞아요."
서은하가 팔짱을 끼며 동의했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파악이 되네요. 저런 파티, 예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어요. 처음엔 다 저래요.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다 시키고, 나머지는 뒤에서 지켜만 보고."
하늬가 미간을 좁혔다.
"신경 쓰이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청각이 예민한 그녀는 한도윤의 숨소리가 어디까지 들리는지, 그 숨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었다.
김판수는 그저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닙니다."
그 말에 강여진이 그를 흘겨봤다.
"저 사람 완전 무리하고 있잖아요. 봤으면서."
"봤습니다."
"그런데도?"
"저 사람이 선택한 파티입니다. 지금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닙니다."
"선택이라고요?"
강여진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저 사람 표정 못 봤어요? 그건 선택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어요."
김판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압니다. 하지만 저기 끼어드는 게 저 사람을 돕는 건지, 저 사람의 처지를 더 어렵게 만드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파티 안의 문제는 그 파티 안에서 정리되어야 합니다. 밖에서 손을 대면, 대개는 더 나빠집니다."
강여진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앞을 보았다.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좁은 통로를 지나 조금 넓은 공간에 이르렀을 때, 강여진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잠깐 쉬었다 가요."
공간은 천장이 조금 높았고, 바닥에는 마른 흙이 깔려 있었다. 벽 한쪽에는 오래된 물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다른 이들이 자리를 잡는 사이, 강여진은 배낭에서 여벌 갑옷을 꺼내며 슬쩍 김판수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갑옷 상단을 풀었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딸깍, 났다. 안에 입은 옷이 헐렁하게 드러났다.
"덥네요."
그녀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서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거예요."
"그냥 갑옷 좀 정리하는 거예요."
강여진의 시선은 김판수를 향해 있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이 순간에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가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는 손끝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김판수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놓치지 않으려 했다.
김판수는 그녀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배낭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바닥이 차가워서, 갑옷 벗으시면 감기 걸립니다."
강여진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네?"
"이 던전, 습도가 높아서 체온이 빨리 떨어집니다. 담요 덮으세요."
그의 손은 이미 다음 배낭 쪽으로 향해 있었다. 시선도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담요와 배낭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강여진은 담요를 받은 채 잠시 굳어 있었다. 그녀는 뭔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선이 스치듯 아래로 향하는 순간, 혹은 말끝에 붙는 어색한 웃음 같은 것. 그런 게 늘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김판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배낭을 정리하며 다음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손이 건량 봉지를 뒤적이는 소리만 들렸다.
강여진은 담요를 받은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냥 순수하게, 그녀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방어적으로 세워두었던 경계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하늬가 옆에서 킥킥 웃었다.
"여진 언니, 얼굴 빨개졌어요."
"아니야."
강여진이 서둘러 담요를 두르며 고개를 돌렸다. 담요를 두르는 손끝이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거야."
"뭐가 놀라운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서은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김판수의 옆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담요를 건넨 손, 그리고 다시 배낭으로 향한 시선. 아무 의도도 없어 보이는 그 무심함이, 왜인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그녀는 팔짱을 조금 더 세게 끼었다.
지민이 옆에서 육포를 씹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싸움도 없이 쉬는 시간부터 재밌네요."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통로 저편에서 다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웅—
이번 것은 지금까지 들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깊었다. 바닥을 통해 진동이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배낭 위에 놓아둔 물통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김판수가 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굳어졌다.
"...이건, 조금 다릅니다."
서은하가 지팡이를 다시 고쳐 쥐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다른데요?"
김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둠이 짙어진 통로 안쪽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늬가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요."
강여진이 담요를 두른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워지는 거예요?"
"아뇨."
하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커지는 거예요. 아직 가까워지진 않았는데, 소리 자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
그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김판수는 여전히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배낭 옆에 세워둔 도끼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무언가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 이 던전 깊은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