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긴급 의뢰서에는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동부 던전. 이변 발생. 등급 상향.
오미래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지금 이 조건 채울 수 있는 팀이 이 길드에 없어요. 다들 던전 나가 있고요."
서은하는 여전히 김판수를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매가 좁혀졌다가 다시 펴졌다가 했다.
"임시로만이에요."
그녀가 못을 박듯 말했다.
"이번 던전만. 그다음엔 없어요."
강여진이 팔짱을 풀며 덧붙였다.
"이상한 짓 하면 바로 검 뽑을 거예요."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손끝이 이미 검자루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늬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밥은 먹여주는 거죠?"
김판수는 그 질문에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네."
하늬의 귀가 쫑긋 섰다.
"오, 그럼 나쁘지 않네."
오미래가 서류에 서명을 받으며 한숨을 쉬었다.
"임시 파티 승인. 던전 클리어 후 즉시 해체. 아시죠들?"
"알아요."
서은하가 짧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김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그렇게 임시 파티가 되었다. 서로 이름도 제대로 모른 채였다.
길드 로비를 나서는 길, 강여진이 걸으며 슬쩍 물었다.
"판수 씨. 원래 어느 소속이었어요?"
"소속은 없었습니다."
"프리랜서 헌터?"
"비슷합니다."
더 캐묻고 싶었지만 강여진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은 그 느낌을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동부 던전 입구는 습한 공기로 가득했다.
돌 틈에서 새어 나오는 물소리.
이끼 냄새.
오래된 습기가 배인 벽.
입구에 걸린 경고판에는 붉은 스티커가 새로 붙어 있었다. 등급 상향. 미확인 이변.
서은하가 그 스티커를 손끝으로 한 번 문지르고는 앞장서서 걸으며 말했다.
"등급 이상이라고 했으니까, 서둘러야 해요."
강여진이 검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판수 씨는 뒤에서 따라오세요. 위험하니까."
뒤에 서라는 말에 김판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서운한 기색도 없었다.
하늬가 그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안 서운해요? 맨 뒤로 밀리는 거."
"딱히요."
"신기한 사람이네."
하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던전 내부로 들어서자 통로가 좁아졌다. 천장이 낮았다.
바닥에는 오래된 물웅덩이가 곳곳에 고여 있었고, 그 위로 발소리가 낮게 울렸다.
찰박.
찰박.
네 사람의 발소리가 겹쳐 들렸다.
한동안은 평온했다.
작은 슬라임 몇 마리를 강여진의 검이 손쉽게 처리했다. 서은하의 마법이 잔여 몬스터를 태웠다.
"이 정도면 등급 상향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강여진이 검을 털며 중얼거렸다.
"방심하지 말아요."
서은하가 곧바로 받아쳤다.
"이변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붙는 게 아니에요."
하늬는 앞장서 걸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녀의 코끝이 조금씩 찡그려졌다.
"뭔가 냄새가 이상해."
그녀가 멈춰 섰다.
축축한 돌 냄새.
슬라임이 녹아 남긴 산성 냄새.
그리고 그 아래, 낮게 깔린 다른 냄새.
"피 냄새야. 그런데... 몬스터 피가 아니야."
서은하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예요."
"몬스터 피는 이렇게 안 나. 이건... 사람 피에 더 가까워."
강여진의 손이 검자루를 더 세게 쥐었다.
"그럼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거야?"
"모르겠어. 근데 확실히 이상해."
그 순간, 통로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웅—
벽이 흔들렸다.
돌가루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강여진이 검을 고쳐 잡았다.
"뭐야."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통로 양쪽 벽에서 검은 형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개의 눈이 동시에 붉게 빛났다.
"몬스터 웨이브잖아!"
서은하가 소리쳤다.
원래 이 등급의 던전에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이변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하늬가 손톱을 세우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앞을 막을게!"
강여진도 검을 들고 뒤따랐다.
"뒤는 맡길게요, 은하!"
"알아요!"
서은하는 지팡이를 세워 마법진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력이 순간 흔들렸다. 최근 계속된 거절과 스트레스로 마력 소모가 컸다.
"...이런."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지팡이 끝의 마법진이 반쪽 그려지다 흐트러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몬스터 하나가 그녀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김판수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허공에 격자무늬가 그려졌다. 익숙한 무늬였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것은 5년간 창천 패왕단을 지켜온 것과 같은 결계였다.
결계가 통로 전체를 감쌌다.
몬스터들의 돌진이 순간 벽에 부딪히듯 튕겨 나갔다.
퉁, 퉁, 퉁.
몬스터들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뭐야, 이거?"
강여진이 놀라 물었다.
"몬스터들이 갑자기 못 지나와."
하늬도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 잘만 오던 애들이 왜 저래?"
김판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손짓을 이어갔다.
통로 바닥의 흙이 스스로 부풀어 올랐다. 좁은 통로가 순식간에 좁아지며, 몬스터들이 한 줄로 밀려들 수밖에 없는 지형으로 바뀌었다.
바닥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흙이 솟아나고, 돌이 자리를 옮기고, 좌우 벽이 안쪽으로 조금씩 조여들었다.
"이게 무슨..."
서은하가 말을 잃었다.
토목 스킬. 지형 조작. 레벨1짜리 인프라 스킬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규모였다.
그녀는 마법사였다. 마법의 규모와 소모되는 마력의 관계를 몸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리 봐도 계산이 맞지 않았다.
좁아진 통로로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강여진과 하늬가 하나씩 처리했다. 결계 덕분에 후방이 안전해지자, 두 사람의 움직임도 훨씬 여유로워졌다.
강여진의 검이 정확히 몬스터의 목을 갈랐다. 하늬의 손톱이 다른 한 놈의 배를 갈랐다.
"어? 이거 편한데?"
하늬가 씩 웃으며 다음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편하다고 방심하지 마세요."
강여진이 낮게 경고했지만,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은하는 흔들리던 마력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었다.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다시 화염이 피어올랐다.
이상하게도 마력이 아까보다 더 매끄럽게 흘렀다. 방금까지 손끝을 떨게 하던 소모감이 어느새 옅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감각에 순간 멈칫했지만, 눈앞의 몬스터에게 곧바로 집중해야 했다.
화염이 통로를 가르며 몬스터들을 한꺼번에 태웠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지고, 통로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먼지가 가라앉는 소리.
물웅덩이 위로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 소리.
그리고 네 사람의 숨소리.
강여진이 검을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그 결계, 누가 친 거야?"
대답이 없었다.
김판수는 이미 결계를 지우고,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고 있었다.
"다들 목 좀 축이세요."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마치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물통을 받아 들면서도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거... 방금 그거, 당신이 한 거예요?"
"토목 스킬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니."
강여진이 미간을 좁혔다.
"몬스터 웨이브 통째로 막은 게 별거 아니라고요?"
"레벨1 스킬이라서요."
김판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레벨1이 뭐 어쨌다고."
강여진이 검을 검집에 꽂으며 중얼거렸다.
"레벨1짜리 스킬로 벽이 통로를 막고, 바닥이 지형을 바꾸는 거 봤어요? 나는 처음 봐요."
"저도 처음 봅니다."
"...뭔 소리예요, 그게."
김판수는 대답 없이 물통을 하늬에게 하나 더 건넸다. 그 침묵이 강여진의 의심을 더 짙게 만들었다.
서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방금 자신의 마력이 흔들렸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직후 이상하게 빠르게 회복된 감각에 머물러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고쳐 쥐며 손끝의 감각을 되짚어보았다. 흔들리던 마력이 어느 순간부터 매끄러워졌다. 저절로 그렇게 됐을 리는 없었다. 누군가 손을 댄 것처럼,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그녀는 김판수를 흘긋 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배낭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늬가 배낭에서 나온 육포 조각을 받아먹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거 판수 씨가 만든 거예요?"
"네."
"...맛있어요."
하늬의 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조미료는 뭘 썼어요?"
"소금이랑 후추, 그리고 몇 가지 더."
"몇 가지 더가 뭔데요."
"비밀입니다."
하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네."
"그런 편입니다."
김판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태도가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여진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김판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자체를 아직 신뢰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판수 씨."
"네."
"진짜 정체가 뭐예요?"
"토목 인프라 담당자입니다."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곤 없습니다."
강여진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의 사람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물통 뚜껑을 닫고 있었다. 더 캐물을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네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통로는 계속 안쪽으로 이어졌다. 벽의 습기는 점점 짙어졌고, 물소리도 점점 커졌다.
서은하가 앞서 걸으며 지팡이 끝으로 벽을 한 번 두드렸다. 돌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되돌아왔다.
"이 안쪽에 큰 공간이 있어요."
"얼마나 큰데요?"
강여진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울림이 예사롭지 않아요."
던전 안쪽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던전에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날 참이었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사람의 것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