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던전 최하층,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먼지가 가라앉았다. 벽에 걸린 횃불이 흔들렸다.
최강혁은 검을 검집에 꽂으며 웃었다. 소라와 지민, 유나는 서로를 향해 손바닥을 마주쳤다. 승리의 함성이 좁은 석실을 채웠다.
그 모든 소리 뒤편에서, 김판수는 조용히 손을 뻗고 있었다.
허공에 희미한 격자무늬가 떠올랐다. 결계였다. 방금까지 그 결계가 파티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 전, 몬스터의 발톱이 유나의 등을 노렸을 때. 결계가 그 궤적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냈다. 유나는 그것을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다.
김판수는 손끝으로 결계를 지웠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닥에 흩어진 몬스터의 사체 사이로, 그가 5년간 흘렸던 회복의 빛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아무도 그 빛의 출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판수 씨."
최강혁이 그를 불렀다. 목소리에 여느 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예."
"이제 그만 나갑시다."
김판수는 고개를 들었다. 최강혁의 표정은 담담했다. 담담한 얼굴로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파티, 이번 던전까지만 함께하는 걸로 합시다. 레벨1 스킬만으로는 이제 한계가 있어요."
소라가 옆에서 팔짱을 끼며 말을 얹었다.
"그러게. 요즘 던전 난이도가 확 올랐잖아. 자꾸 짐이 되면 우리도 곤란하지."
짐이 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 결계도, 그 회복도, 모두 김판수의 손끝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유나가 덧붙였다.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고요. 그동안 밥해주신 거, 감사했어요."
밥해준 것. 그게 5년간 그가 이 파티에서 한 일의 요약이었다.
지민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동안 청소도 잘 해주시고, 캠프 정리도 항상 판수 씨가 해주셨잖아요. 그런 건 진짜 감사했어요."
청소. 캠프 정리. 그것도 요약이었다. 결계를 치고, 상처를 봉합하고, 몬스터의 기척을 미리 읽어 위험을 피하게 한 것은 요약되지 않았다.
김판수는 잠시 침묵했다.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5년 전, 처음 파티에 합류했을 때를 떠올렸다. 최강혁은 그때도 웃는 얼굴로 그를 받아줬다. 그때는 그 웃음이 고마웠다.
지금 이 웃음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다만 이번엔 그를 밀어내는 웃음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짧았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지민이 미안한 듯 웃었다.
"섭섭하게 안 생각하시니 다행이네요."
섭섭하지 않았다. 정말로 섭섭하지 않았다.
김판수는 배낭을 챙기고 등을 돌렸다. 던전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계단은 좁고 어두웠다. 벽을 짚은 손끝에 오래된 돌의 냉기가 스쳤다. 5년 동안 수백 번을 오르내린 계단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아무 무게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에서 최강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진짜 창천 패왕단답게 갈 수 있겠군."
김판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상으로 나오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풀 냄새.
젖은 흙 냄새.
먼 곳에서 불어오는 강물 냄새.
5년 동안 던전 안에서만 맡았던 냄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숨이 트였다.
허탈함이 아니었다. 해방감이었다.
김판수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뭘 하지."
혼잣말이 나왔다.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배낭 속에서 낡은 지팡이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파티원들 눈앞에서 제대로 써본 적 없는 지팡이였다. 항상 결계 뒤에서, 그늘 속에서만 쓰였던 물건이었다.
김판수는 지팡이를 꺼내 손에 쥐어보았다. 익숙한 무게였다. 이제는 숨길 이유도 없었다.
한빛 모험가 길드까지는 걸어서 반나절 거리였다. 김판수는 천천히 걸었다. 급할 이유가 없었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개를 데리고 뛰어가는 모습. 노점에서 빵을 파는 노인의 손짓. 5년 동안 이런 풍경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길드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게시판 앞에 세 여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은백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였다. 귀가 뾰족했다. 하이엘프였다.
한 명은 갑옷을 입은 채였다. 어깨가 넓고 체격이 좋았다. 손에는 이미 접힌 지원서 몇 장이 쥐어져 있었다.
한 명은 등 뒤로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수인족이었다. 표정이 지루한 듯 늘어져 있었다.
게시판 앞의 다른 모험가들이 그들을 힐끗거리며 속닥거렸다.
"저기 저 셋이야?"
"레벨5짜리 셋이 파티를 못 구한다는 게 말이 돼?"
"소문 못 들었어? 남자만 보면 눈에 불을 켠다던데."
"괜히 얽히지 말자."
속닥거림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저번에 어떤 놈이 껄떡거렸다가 손목이 부러졌다던데."
"그건 좀 오버 아니야?"
"몰라, 소문이 그래."
김판수는 그 대화를 흘려들으며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접수처에 앉아 있던 오미래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판수 씨! 오늘 던전 일찍 끝났네요?"
"끝난 게 아니라, 끝났습니다."
오미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창천 패왕단에서 나왔습니다."
오미래의 손에서 서류가 미끄러졌다.
"네? 갑자기요? 왜요?"
"이제 저 없이도 잘한다고 하더군요."
오미래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 안타까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 사람들, 판수 씨가 얼마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오미래는 지난 5년간 길드 접수처에서 창천 패왕단의 던전 보고서를 처리해왔다. 보고서마다 이상하게 생존율이 높았고, 부상률이 낮았다. 그 이유를 누구도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오미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김판수가 손을 저었다.
"오히려 후련합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얼굴에서도 그것이 드러났다.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오미래는 그 표정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게시판 앞의 세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오가는 사이, 접수처 안쪽에서 다른 직원이 서류철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저 세 사람 또 왔네."
"이번엔 몇 번째래?"
"여덟 번짼가, 아홉 번짼가."
오미래가 다시 김판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판수 씨."
"네."
"혹시 지금 시간 있으세요?"
김판수는 오미래의 시선을 따라갔다. 세 여자가 여전히 게시판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중 은백색 머리의 여자가 방금 붙였던 지원서를 다시 떼어냈다. 표정이 냉랭했다.
"또 거절이네."
갑옷을 입은 여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 주 들어 여덟 번째야."
수인족 여자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하늘을 봤다.
"배고파."
"먹는 거 말곤 생각 안 나?"
갑옷의 여자가 쏘아붙였다.
"배고픈데 생각이 나겠어?"
수인족 여자가 되받아쳤다.
짧은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 오미래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손을 들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세 여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은백색 머리의 여자, 서은하의 시선이 오미래 뒤편에 서 있는 김판수에게 닿았다.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또 남자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계가 담겨 있었다.
김판수는 그 눈빛을 마주 보며,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어색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갑옷을 입은 여자, 강여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미래 씨, 우리 벌써 여덟 번이나 거절당했어요. 또 소개해주는 거면 그만두세요."
"이번엔 좀 다를 거예요."
오미래가 웃으며 말했다.
서은하가 김판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빛이 노골적으로 못마땅했다.
"레벨은요?"
"1입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늬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레벨1이요? 우리보고 그 사람 짐 들어주라는 거예요?"
강여진이 한숨을 내쉬며 지원서를 접었다.
"오미래 씨, 우리 진심으로 급해요. 레벨5짜리 셋이 여덟 번 거절당한 이유 아세요? 아무도 우리랑 파티 안 하려고 해서예요. 레벨1까지 끌고 갈 여력 없어요."
서은하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저 눈빛 보세요. 우리한테 관심 있는 눈빛이잖아요."
김판수는 그 말에 오히려 당황했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됐어요, 됐어."
서은하가 말을 잘랐다.
오미래가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게시판 앞에 새로운 종이 한 장이 붙었다. 길드 직원이 급하게 뛰어와 붉은 도장을 찍었다.
"긴급 의뢰!"
직원의 목소리가 컸다.
"동부 던전, 등급 이상 이변 발생. 즉시 파티 필요! 최소 4인 편성!"
주변에 있던 모험가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몇몇은 이미 등급을 확인하고 고개를 젓고 뒤로 물러났다.
"등급 이상이라니, 저건 좀 위험한데."
"동부 던전이면 원래 안정적인 던전이었잖아."
"뭔가 이상 현상이라도 생겼나 보지."
서은하와 강여진, 하늬가 서로를 쳐다봤다.
지금 이 자리에는 셋뿐이었다. 4인 편성 기준을 채우지 못했다.
강여진이 게시판에 붙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보상이 꽤 크네."
"보상보다 인원이 문제야."
서은하가 대꾸했다.
하늬가 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거 끝나면 밥부터 먹자."
오미래가 조용히 웃었다.
"마침, 딱 필요한 인원이네요."
세 여자의 시선이 다시 김판수에게 모였다.
서은하의 눈매가 좁아졌다.
"진심으로 저 사람을 넣자는 거예요?"
강여진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김판수를 쳐다봤다. 레벨1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레벨1로 등급 이상 던전에 들어간다는 게, 그게 말이 돼요?"
하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죽어도 우리 책임은 아니잖아."
"하늬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강여진이 낮게 나무랐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게시판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시간이 급하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파티 편성 시간 마감 삼십 분 남았습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게시판 앞에 모여든 모험가들이 저마다 서둘러 짝을 찾아 흩어졌다.
네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김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5년 동안 늘 그래왔던 자세였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몸에 익어 있었다.
하지만 오미래의 표정에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서은하의 시선이 여전히 김판수를 향해 있었다. 차갑고,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