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지도 못하는 몸이라니

5화

숲을 빠져나오자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바람이 훅 불어와 마른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팔다리가 없는 몸이라 그런지 바람 하나에도 몸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들것에 묶여 꼼짝도 못 하는데 말이다. 멀리 성벽 같은 게 보였다. 돌로 쌓아 올린 회색 벽이 해 질 무렵 햇빛을 받아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뜻 보면 그림 같은데, 저기가 목적지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목적지 접근 중. 예상 도착: 30분.] 30분이라니. 팔다리도 없이 들것에 실려서 30분을 더 흔들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벌써부터 허리가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아니 허리도 있으니 아플 만하지. 팔다리가 없다고 몸 전체가 없는 건 아니니까. 마차 대신 들것에 실린 채로 이동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없으니 걷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들것을 멘 병사 둘이 번갈아가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냥 짐짝처럼 흔들렸다. 위아래로, 좌우로. 전생에 놀이공원에서 탔던 놀이기구보다 훨씬 재미없는 흔들림이었다. 소영이 내 옆에서 계속 걸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표정만은 다부졌다. 이마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그런데도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독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도련님, 저기 보이는 곳이 임시 본부예요." "본부라니, 무슨 조직이에요?" 물음에 소영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 잠깐의 침묵이 나는 유독 신경 쓰였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저렇게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가. "자세한 건 도착해서 설명드릴게요." 또 저 대답이었다. 뭔가 자꾸 미뤄지는 느낌이었다. 미뤄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쯤 되면 그냥 나 빼고 다 아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정보 접근 제한. 등급 부족.] 등급 부족이라니. 게임도 아니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전생에 하던 온라인 게임에서도 레벨 부족하면 던전 입장 못 하는 건 있었지만, 내 인생에까지 등급이 매겨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팔다리 없는 채로. "소영 씨, 저 원래 이렇게 정보 제한 걸리는 몸이었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도련님." 모른다는 대답도 벌써 세 번째였다. 이쯤 되면 모른다는 말 자체가 하나의 정보 같았다. 들것이 덜컹거릴 때마다 없는 팔다리 자리가 저릿저릿했다. 환지통이라고 했던가. 전생 기억 어딘가에 있던 단어였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자리가 아픈 감각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참 잔인했다. 본부에 도착하자 갑옷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철컥철컥 울렸다. 갑옷 표면에 반사된 저녁 햇살이 눈을 찔러왔다. 다들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뭐, 팔다리 없는 몸으로 실려왔으니 신기하긴 하겠지. 한 명은 대놓고 입을 벌리고 쳐다봤고, 다른 한 명은 옆 사람을 팔꿈치로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예의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조직인지 의문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누군가 앞장서서 안내했다. 발걸음이 빠른 사람이었다. 들것을 멘 병사들이 따라가느라 숨을 헐떡였다. 나는 그저 실려가는 짐짝이었을 뿐이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회의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천장이 높고, 벽에는 낡은 지도와 문양이 걸려 있었다. 공기 중에는 쇠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중앙에 큰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갑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주름진 눈가와 다르게 눈동자만은 젊은 사람처럼 또렷했다. 몸에 밴 자세부터가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 같았다. "이도윤 도련님. 처음 뵙겠습니다." 격식체였지만 어딘가 경직된 어조였다. "저를 아세요?" "명성은 들었습니다." 명성이라니. 팔다리 없는 몸으로 무슨 명성을 들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팔다리 없이 살아 있는 게 그 자체로 명성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참 서글픈 명성이었다. 남자가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붉은 선으로 여러 구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일부 구역엔 X표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딱히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저희는 왕국 직속 특수조사대입니다. 실종된 도련님을 찾기 위해 파견됐습니다." [조직 정보 확인: 왕국 직속 특수조사대.] 특수조사대라니, 이건 또 뭔데. 전생 기억으로 치면 강력계 형사 같은 느낌인가. 아니면 국정원? 아무튼 이름만 들어도 뭔가 골치 아픈 조직인 건 확실했다. "저를 왜 찾은 거예요?" "도련님은 왕국의 중요한 자산입니다." 자산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거리감을 만들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뭐, 이 몸뚱이가 정상은 아니니까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자산이라니, 그럼 제가 도망가면 절도 사건 되는 거예요?" 최대한 가볍게 던진 말인데 남자는 웃지 않았다. 농담이 안 먹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리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자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봤다. "방금 지하실에서 보인 회복 마법. 그 위력이 저희가 알던 것과 다릅니다." 다르다니, 얼마나? "저희 기록에는 도련님의 회복 마법이 단순 치유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보인 것은, 3등급 부상자를 즉시 완전 회복시키는 수준입니다." [정보 대조: 기존 등록치 vs 관측치. 불일치 판정.] 불일치라니, 나도 몰랐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냥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니까 손이, 아니 손도 없는데 마음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게 뭐가 문제예요?" "문제는, 저희가 도련님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면 정확한 등급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남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등급이 낮게 잡히면 저희도 배정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가 한정됩니다. 반대로 높게 잡히면, 그만큼 노리는 이들도 많아지겠지요." 노려진다는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팔다리도 없는 몸으로 노려지기까지 하면 정말 방법이 없는데. "그래서 제안이 있습니다." [강제 이벤트: 등급 평가 시험.] 또 뭐가 시작되려는 건데. "평가라고요? 저는 지금 팔다리가 없는데요." 최대한 냉소적으로 뱉었다. "팔다리 없이 뭘 어떻게 시험 본다는 거예요, 굴러다니면서 봐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필요합니다." "알고 있으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게 더 무섭네요." 뒤에서 소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도련님, 거부하실 수도 있어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소영은 항상 그랬다. 격식은 지키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늘 진짜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거부한다고 해서 뭐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선택지: 시험 수락 / 거부.] 선택지까지 뜨네, 이거 참. 정말 게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앞에 떡하니 떠 있었다. 다른 점은, 여기선 잘못 고르면 목숨이 걸릴 수도 있다는 거였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남자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거부하시면, 도련님의 신병을 확실히 보호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명분이라니. 결국 이것도 정치적인 거구나. 한숨이 나왔다. 한숨 쉴 폐가 남아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팔다리는 없어도 폐는 있으니까, 이런 순간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말하는 순간 속으로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팔다리도 없는 몸으로 뭘 어떻게 시험을 본다는 건지. 혹시 회복 마법으로 나 자신을 회복시키는 시험인가. 아니면 그냥 굴러다니면서 장애물을 통과하는 건가. 상상만으로도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시험은 내일 아침, 훈련장에서 진행됩니다." [시험 예정: 12시간 후.] 12시간이라니, 생각보다 빠르잖아. 준비할 시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시험장이라는 소리 아닌가. 회의실을 나오자 다시 소영이 곁으로 왔다. 손에 담요 같은 걸 들고 있었다. "도련님, 오늘은 여기서 쉬셔야 해요." 안내받은 방은 좁았지만 깨끗했다.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 그게 전부였다. 소영이 내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있지도 않은 손이었지만, 그 온기만은 어깨에서 느껴졌다. "도련님, 걱정 마세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그 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다. 솔직히 말하면 위로가 되는 정도를 넘어서, 그 말 한마디가 없었으면 오늘 밤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영 씨, 내일 시험 어떻게 하는 건지 진짜 몰라요?" "저도 처음 듣는 방식이에요. 하지만 도련님이시라면 잘하실 거예요." 근거 없는 믿음이었지만, 그 근거 없음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창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같은 착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또각, 또각. 환청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소영이 곁에서 잠든 걸 확인한 뒤에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마치 누군가 창밖을 서성이는 것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다가 뚝, 소리가 끊겼다. 끊긴 뒤의 정적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소리가 있을 때는 뭔가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소리가 사라지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본부 외곽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아무도 그 사실을 도윤에게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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