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챙, 챙, 챙!
곰팡이 냄새와 쇳내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벽에 박힌 조명석 몇 개가 깜빡거리며 그 광경을 비췄다. 어두웠다가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밝았다가.
[그 여자]는 만만치 않았다. 몸놀림이 인간 같지 않았다.
한 번의 도약으로 벽을 딛고 튀어 올랐다가, 그대로 병사 하나의 어깨를 걷어차는 게 보였다. 저게 사람이야, 고양이야?
"물러나! 이쪽으로!"
갑옷 입은 누군가가 소리쳤다. 낯선 목소리인데도 다급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여전히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다. 팔도, 다리도.
돌바닥이 차가웠다. 등에 닿은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고,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옆구리 쪽으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내 피인지 남의 피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구조 대상 이동 불가. 즉시 조치 필요.]
또 그 알림이었다.
조치는 무슨 개나발이야, 사슬을 끊든 뭘 하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 시스템이라는 건 꼬박꼬박 상황 보고만 하고 정작 도움은 하나도 안 주네. 라디오 뉴스 앵커도 이거보단 능동적일 텐데.
그때 누군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파란회색 머리를 한 묶음으로 정리한 여자였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눈매가 어딘가 익숙했다. 콧대의 각도라든가, 입술을 깨무는 버릇 같은 것도. 그런데 그게 정확히 언제, 어디서 봤는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 찬 방 같았다. 손을 뻗으면 뭔가 잡힐 것 같은데, 막상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느낌.
"도련님, 저예요. 소영이에요."
소영···?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여전히 안 잡혔다.
[기억 손상 지속 중.]
지속 중이라니, 그럼 손상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거야, 아니면 그냥 지금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거야. 시스템이라는 놈은 왜 항상 문장을 한 줄로 끝내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지.
"이거 좀 끊어줄 수 있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존댓말이 나오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도련님이라는데, 도련님이 저한테 뭘 부탁하는 걸 존댓말로 하는 게 맞나. 근데 딱히 반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여자한테 반말을 하면 뭔가 큰 죄를 짓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소영이라는 여자가 내 사슬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철컹.
사슬이 풀렸다. 팔이 없어서 그런지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상태 변화: 구속 해제.]
해제됐다고 해서 딱히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되는 건 아니었다. 팔이 없는데 사슬을 풀어봤자 뭐가 달라지나 싶었지만, 그래도 뭔가 짓눌린 압박감 하나는 사라진 느낌이었다.
뒤에서 그 여자와 침입자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으아악!"
누군가 튕겨나갔다. 갑옷이 벽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콰앙.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병사 하나가 벽에 부딪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헬멧이 반쯤 깨진 채였다.
숫자가 밀리고 있었다.
[전황 불리. 회복 마법 사용 권장.]
뭐?
회복 마법이라니, 나한테?
"저는 팔다리가 없는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팔다리 없이 뭔 마법을 쓰라는 건지. 주문을 외우려면 손짓이든 발짓이든 뭐든 있어야 될 거 아닌가. 아니면 그냥 눈짓만 하면 되는 시스템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소영이 나를 안아 들었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는 게 서글펐다.
가벼운 게 왜 서글프냐면, 사람 몸이라는 게 어느 정도 무게가 있어야 사람답게 느껴지는 건데, 지금 나는 그냥 헐렁한 옷가지 하나 들어 올린 것처럼 취급되고 있었으니까.
"도련님, 조금만 참으세요."
참으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게 서러웠다. 뭘 참으라는 건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만 했다. 목만 겨우 까딱거릴 수 있었다.
그 순간, 다친 병사 하나가 소영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피가 철퍽 튀었다.
배가 갈라져 있었다. 창자가 보일 정도였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위액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의 내장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 처음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 상황에서 이딸따구니 없는 데자뷔를 느끼는 내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치명상 감지. 회복 마법 발동 조건 충족.]
뭐라고?
몸이 이상했다. 손이 없는데도 뭔가 뻗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뭔가 뜨거운 게 몰려나오는 감각이었다. 팔이 있었다면 분명 그 팔을 따라 흘러나갔을 텐데, 팔이 없으니 그냥 허공으로, 아니 정확히는 그 병사의 배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환한 빛이 병사를 감쌌다.
빛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 같은 온도였고, 그 빛 속에서 뭔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이 끓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엄, 엄청난."
소영이 숨을 삼켰다.
병사의 배가 서서히 닫혔다. 창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살이 다시 이어붙었다.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병사는 그대로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금까지 배가 갈라져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자기 배를 만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사람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회복 마법 발동. 대상: 3등급 부상자.]
3등급이라니, 등급까지 매겨지는 거였나. 그럼 나는 지금 무슨 등급의 마법을 쓴 거고, 등급이 높으면 뭐가 더 좋은 건데.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물어볼 데가 없었다.
"···나, 나 지금 뭐 한 거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싸움 소리가 멈췄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방금까지 칼과 칼이 부딪히던 곳에서 갑자기 아무 소리도 안 나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여자마저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후드 속 눈이 이글거리는 게 느껴졌다.
멀리서도 저 눈빛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불이 붙은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노려보는 짐승의 눈 같기도 했다.
"···네가."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놀라는 건데. 나도 나 자신이 뭘 한 건지 모르겠는데 저 여자는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경고: 정체 노출.]
노출? 뭐가 노출됐다는 건데.
옷이 벗겨진 것도 아니고, 정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시스템은 왜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만 이렇게 불친절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변 병사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경외, 혹은 두려움 같은 거였다.
방금까지 나를 그저 구조해야 할 대상 정도로 취급하던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이런 회복력은···"
누군가 말을 흐렸다.
말을 끝맺지 못하는 게 더 불안했다. 차라리 뭐라고 확실하게 말을 해주면 좋겠는데, 다들 서로 눈치만 보면서 말을 삼켰다.
그 여자가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목소리에 여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의 여유롭던, 심지어 즐기는 듯하던 태도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경계심이었다. 나를 향한, 순전히 나를 향한 경계심.
그녀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 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적대 대상 후퇴.]
후퇴라니. 아니 잠깐, 저게 도망친 거야?
방금까지 병사들을 압도하던 그 실력으로, 갑자기 도망을 친다고? 그것도 나 때문에?
지하실 안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숨소리, 갑옷 부딪히는 소리, 신음 소리조차 잠시 멎었다. 다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듯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소영이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도련님,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왜냐면 나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어디서 나온 건지도 모를 그 뜨거운 감각이, 이제는 오히려 몸속 어딘가가 텅 빈 것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갑옷 입은 병사 하나가 무전기 비슷한 걸 꺼냈다.
기계 표면에 낡은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오랫동안 험하게 굴려온 물건 같았다.
"본대에 보고합니다. 대상 확보 완료. 그런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목소리가 재촉했다.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훨씬 더 낮고 무거웠다.
"대상의 마력 반응이, 저희가 알던 것과 다릅니다."
그 말에 소영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품 안에서 소영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내 심장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그 품 안에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병사들이 나누는 시선, 무전기 너머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소영이 애써 감추려는 떨림까지. 그 모든 게 하나로 겹쳐지면서, 이건 그냥 구조로 끝날 상황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체가 노출됐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정작 그 정체가 뭔지도 모른다.
이름도, 얼굴도, 왜 팔다리가 없는지도, 왜 소영이라는 여자가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는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는 지금 뭔가 거대한 것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기분이었다.